[Review] 성찰 없는 유토피아는 없다. - 연극 '작가'

'여성'이자 '작가'라는 끊임없는 고뇌의 운명, 탈(脫) 권력에 관하여
글 입력 2020.12.0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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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석의 한 여자가 갑자기 극이 끝난 듯 보이는 빈 무대로 난입하며 연극은 시작된다. 가방을 놓고 왔다는 그녀는 무대 뒤에서 나온 남자와 마주친다. 그는 방금 끝난 극의 연출이었다. 남자는 집요하게 극에 대한 소감을 묻고 여자는 극의 성 감수성 결여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 여자를 흥미로워하며 그 분노를 극으로 쓰면 어떻게냐고 하는 남자. 알고 보니 둘은 몇 년 전 토론 대회에서 같은 팀을 한 적이 있었고 작가 지망생인 여자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던 연출가는 아직 미성년자였던 여자에게 키스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 그래도 네가 여자였기에 그런 기회라도 오는 것이 아니냐고 하는 남자와 자신은 작품으로만 인정받고 싶었다고 울부짖듯 이야기하는 여자.

 

갈등이 갑자기 중단되고 한 스텝이 들어와 의자 네 개를 놓는다. 사실 앞의 이야기는 희곡의 일부였던 것이다. 네 개의 의자 위에는 방금 작가 지망생을 연기한 여자배우와 연출가를 연기한 남자 배우 그리고 이 희곡을 쓴 여자 작가와 앞선 무대를 연출한 남자 연출가가 나란히 앉는다. 그들은 앞선 극에 대한 QnA 시간을 갖는다.
 
객석에서 누군가(사실은 그도 배우였다.) 그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담으면서 다른 약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냐는 질문 등. 질문들은 연극 내용보다는 외적인 것에 대한 질문이었고 배우들은 동문서답하며 여작가와 남연출가는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서로의 말을 자르며 팽팽하게 기싸움을 한다.
 
 

작가-단체.jpg

 
 
장면은 다시 바뀌어 이번엔 QnA 시간의 여성 작가가 자신의 희곡 속 주인공 역할 배우로 등장한다. 배경은 한 가정집. 남자는 여자를 위해 소파를 구입하고 저녁식사를 차려주는 등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저녁 식사 음식은 보이지 않는다.) 둘은 소파에서 섹스를 하는데 여자는 꼭 운동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진심으로 그 상황을 즐기고 있다. 사실 그는 책상에 올려진 계약서를 보고 아내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희곡이 영화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의 작품이 영화화되어 돈을 벌 생각에 그것을 종용하는 남자와 자신의 작품이 수정되고 왜곡되는 것은 마치 세상에 나지도 않은 자신의 아이가 강간당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여자 간에는 이내 갈등이 일어난다. 여자는 자신의 작품이 의도와는 다르게 상업화되어 해석되길 두려워하며 피카소 역시 자신이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은 거부하지 않냐고 남자를 설득하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당신은 피카소가 아니라며 소리를 지른다.
 
둘의 갈등의 중간중간 환상처럼 QnA 시간에 등장한 남자 연출가가 나와 시구를 읊는다. 둘은 계속 갈등하고 어디선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린다. 원치 않는 아기의 등장에 당황하는 여자. 갑자기 여자는 시를 읊는다.
 
 
최악인 시간 최악의 계절
최악의 해였다. 모두에게.
한 남자와 아내가 구빈원을 걸어 나왔다.
그는 걸었다. -그들은 함께 걸었다- 북쪽으로.
 
(중략)
 
아침에 그들은 둘 다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추위로. 굶주림으로. 모든 역사의 독으로.
그러나 여자의 발은 남자의 가슴뼈에 안겨 있었다.
살의 마지막 온기는 남나가 여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중략)
 
1847년 겨울에 같이 일어난 그들의 죽음.
또한 그들이 받은 고통. 그들이 살아온 삶.
그리고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있었던 그것.
그리고 어둠 속에서만 가장 잘 드러난다.
 
<격리>-에이븐 볼란드.
 
 
이내 여자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하겠다고 하며 남자와 부자연스럽게 화해의 포옹을 한다. 갈등은 종식되는 듯하고 장면은 바뀐다.
 
거짓말 같고 부자연스럽던 극은 끝나고 갑자기 암흑, 몇 가지 가구들만이 남고 그 가구들을 비추는 빛만이 있다. 그 속으로 나레이션. 나레이션의 내용은 한 여자가 정처 없이 외로운 길을 걷던 중 만난 부족들에 대한 동질감 및 소속감에 대한 것이었고 그곳에서 만난 한 여자와 사랑에 빠져 무아지경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자와 사랑을 나눈 여자는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어떤 남성에게 이끌려 그곳을 빠져나온다는 내용으로 나레이션은 마무리된다.
 
다시 장면은 전환되어 연출가와 작가 사이에 언쟁을 보여준다. 대중성과 상업성을 위해 그럴싸한 결말을 요구하는 연출가와 작품성을 해치기 싫어 사람들이 원하는 결말은 없다고 얘기하는 여자. 남자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당신에게 기회조차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 이야기하며 자신의 권위로 작품에 대한 발언권을 얻으려 하고 그런 남자에게 당신만은 자신을 이해해 줄 줄 알았다며 배신감을 느끼는 여자. 갈등은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종식되지 않은 갈등의 장면이 전환되어 앞서 남자와 작가가 살던 집에 이번엔 작가와 한 여자가 연인으로 살고 있다. 행복한 것 같지만 위태로워 보이기도 하는 둘. 앞선 연인들처럼 저녁 식사를 하려 한다. (이때에는 진짜 음식들이 무대 식탁 위에 오른다.) 사랑을 나누는 남근 모양의 기구를 사용하길 바라는 애인과 그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작가. 마지못해 기구로 사랑을 나눈다. 작가는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애인의 말을 막은 채로 관계를 맺고 성관계 후 애인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짓다 이내 음식을 가져온다. (이때 음식은 장면 3의 음식과 달리 진짜 음식이다.)
 
화가 났냐고 물어보는 작가의 말에 애인은 나이 든 여자와 섹스를 한 적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작가는 아니라며 그런 생각만으로도 몸서리 쳐진다고 한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애인이 본인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자신과 관계를 맺었음에도 말이다. 애인은 갑자기 피카소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게르니카를 그릴 때 피카소는 자신을 두고 싸우는 여성들을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렸음을 알고 있냐는 내용의 이야기를. 순간 모든 조명은 꺼지고 무대에 있던 가구들도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무대의 끝에 작품 게르니카가 올라가고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을 스포트라이트 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크기변환]게르니카.jpg

 
 
연극과 비연극, 무대와 객석이 혼재한 실험적인 형식의 극이었다. 극은 '여성'과 '작가'에 대해서 줄곧 이야기한다. 극 속 작가는 끊임없이 '이상'을 좇는다. 그녀의 이상은 페미니즘적인 유토피아와 순수한 예술의 극치이다. 또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권력에서 벗어나는 탈(脫) 권력이기도 하다. 그녀는 이상을 좇는 내내 여성이라서 괴롭고, 또 작가라서 외롭다.
 
그녀가 여성이어서 느끼는 괴로움을 표현한 모습은 현재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듯했다. 첫 갈등에서 보여주는 분노에 가득 찬 여자의 울부짖음을 남자 연출가는 그저 '흥미로운' 소재거리로 여기거나 사람 좋은 웃음으로 웃어넘긴다. 현실에서도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이들을 조소하고 비꼬거나 '페미는 돈이 된다.'는 말로 상업화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자신은 자신의 여성성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었다고 울부짖는 여자와 네 성적 매력 때문에 그 정도 자리라도 주어졌다고, 사실은 너도 즐기지 않았냐고 묻는 남자의 모습이 단편적으로 현재 각 성별의 입장을 보여주는 듯했다.
 
또 극의 QnA 시간에 관객석의 남자가 '왜 여자의 권리만 이야기하고 나머지 약자는 외면하느냐'와 같은 질문도 상당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많이 부딪히는 질문 중 하나다. 하지만 꼭 피해자가 피해자다워야 할 필요가 없듯 여자들이 모든 약자를 다 대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 가정집에서 자꾸 들려오는 아기 소리도 은연중에 강요되는 엄마의 역할을 의미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더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극이 분노의 표출이나 여성의 권리를 외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적 유토피아와 예술성의 지향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자가당착의 모습과 그에 대한 성찰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는 총 두 번 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 연인인 남과 여의 이야기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고 중간중간 여자가 독백함에 따라 더욱 극적이다. 심지어 남자가 차린 식사도 모두 소품이거나 보이지 않는데 이와는 반대로 두 번째 연인인 여와 여는 진짜 현실 같다. 식사도 따끈따끈하게 무대 위에 올려지고 섹스도 누구 하나에겐 운동인 것이 아니라 함께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이로서 작가는 드디어 남자에게서 벗어나 여자와 사랑을 함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페미니즘적 유토피아에 한발 다가 선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자는 심지어 이번엔 자기 자신에게서 또 다른 권력구조를 느낀다. 나이 어린 여자만을 만나려 하거나 연인의 성생활을 의심하는 등의 모습에서 말이다. 탈남(脫男)하면 될 줄 알았던 가부장제는 그러나 일부 극복되지 못한 채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 작가의 애인은 그런 작가의 자가당착적인 면을 작가가 평소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피카소의 일화를 들어 꼬집는다.
 
약자의 분노는 기득권에겐 때론 재미있는 일이 되기도 한다. 앞서 남자 연출가들이 여자 작가의 분노를 흥미로운 예술 소재로 삼은 일이 그랬고 작가가 나이 많은 여자와 만나는 여자의 상황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역겨운 일로 치부해버리는 것 역시 그렇다. 피카소의 대작으로 불리는 작품 <게르니카>도 사실은 그저 약자들에게 무심한 채 자신의 예술성에만 치중해 그들을 '소재화'했다는 점에서 권력 그 자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연극 <작가>는 이상을 좇는 과정에서 이처럼 부딪힐 수 있는 자가당착적인 면들을 꼬집으며 진정한 성찰이 없는 유토피아의 추구는 오만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마지막 장면은 작가와 관객이 한 방향으로 작품 <게르니카>를 보며 진정한 성찰을 기반으로 한 유토피아로의 방향을 함께 보는 듯 끝이 난다.
 
 

작가 포스터.jpg

 

 

[이강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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