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당신의 전부이길 바랐던 그날의 이야기 [영화]

영화 <클레오의 세계>를 보고
글 입력 2024.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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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잠깐 대구에 산 적이 있다. 파티마 병원에서 태어나 서울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기 전까지 나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던 부모님 대신 대구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 자랐다. 이 년 안팎의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어릴 때였으니 뭐, 그때가 기억나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몸이 그 시간을 기억하는 건지, 할머니 할아버지만 뵈면 오랜만에 고향에 온 것처럼 긴장이 풀리고 온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때 엄마 아빠는 주중에는 회사에 나가다가 주말이 되면 대구에 내려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엄마는 대구집에 올 때면 항상 내가 더 커 있었다고 했다. 지난번까지만 해도 가만히 누워만 있던 내가 어느새 뒤집기를 하고, 그러다가 방에서 기어 나오더니 어느 날은 일어나 걷기 시작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의 그 모든 첫 순간에는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고, 엄마 아빠는 꼭 한발씩 늦었다.

   

대구에서 올라와 유치원에 다니기 전까지는 신길동에서 몇 년을 살았다. 할머니 할아버지 없이 처음으로 엄마 아빠와 셋이 살았던 동네가 바로 신길동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때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사진이나 비디오를 보다 보면 묻혀 있던 기억이 조금은 떠오를 법도 한데, 아무리 노력해 봐도 살았던 집이나 어린이집의 구조, 엄마 아빠의 모습 같은 것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대구에서 보고 겪은 것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꽤 선명하게 남아 있다는 거다. 집 구조는 물론이고 베란다에 늘어져 있던 수많은 화분과 아파트 단지 안의 물이 흐르는 공원, 안방 자개장 위에 올려져 있었던 새빨간 돼지저금통이 너무도 무서웠던 것과 할머니가 소금을 뿌리자 커다란 채반 안에 들어 있는 미꾸라지들이 팔딱팔딱 뛰어오르던 모습,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분홍색 새 자전거를 끌고 육교 위를 걸었던 화창한 날까지.

 

평균적으로 최초의 기억은 세 살에서 네 살 사이에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때쯤 나는 서울에 살면서 가끔 대구에 놀러 가는 정도였으니 대구에서 보낸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들은 전부 대구에 머물러 있는 걸까.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 진정한 집은 엄마 아빠와 처음으로 함께 살았던 서울집이 아니라 내가 나고 자랐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대구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투성이인 무서운 세상에서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무한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려준, 따스하고 포근했던 나의 첫 번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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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엄마와 이별한 클레오에게는 유모 글로리아가 바로 그런 존재이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너무 빨리 클레오의 곁을 떠났고 아빠는 늘 늦은 저녁 클레오가 잠이 들 때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지만, 글로리아는 단 한 순간도 클로에가 외롭지 않도록 클레오의 하루를 가득 채워주었다. 씻기 싫다는 것을 핑계로 좁은 집에서 글로리아와 술래잡기를 하는 클레오의 입가에선 즐거운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이렇듯 글로리아는 클레오에게 엄마 아빠가 없는 집을 집다운 곳으로 만들어주는 소중한 사람이었고, 그곳에서 클레오는 자기와 글로리아 둘만이 존재하는 행복한 세계를 만들어갔다.

 

글로리아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클레오는 방학을 맞이하여 글로리아가 있는 섬에 놀러 간다. 오랜만에 글로리아를 만난 행복도 잠시, 클레오는 어딘가 낯선 글로리아의 모습에 당황한다. 글로리아의 딸과 아들, 갓 태어난 손주가 함께 지내는 집에서 클레오는 자기만의 글로리아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이자 누군가의 엄마인 글로리아를 마주하게 된다.

 

섬에서 지내는 내내 불안하게 흔들리는 클레오의 눈빛에서는 자기 세계의 전부였던 사람에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아이의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계의 주인공에서 관찰자로의 전환은 독점적인 사랑이 익숙하고 당연했던 아이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성장의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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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자라나는 일은 아픔을 동반한다. 클레오는 글로리아가 자기에게 불러주던 노래를 빼앗아 간 아기를 질투하며 나쁜 주문을 걸기도 하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아기를 함부로 만지다가 사랑하는 글로리아에게 된통 혼이 난다. 겁을 먹고 집에서 뛰쳐나온 클레오는 그 길로 높은 절벽에 올라 험한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글로리아의 도움 없이 수영하기를 어려워했던 클레오는 혼자서도 깊은 바다에서 홀로 헤엄쳐 나올 수 있는 아이가 된다.

   

글로리아와의 이별 또한 클레오가 겪는 하나의 성장통이다. 야속하게 클레오와 글로리아에게도 오지 않았으면 했던 이별의 시간이 찾아온다. 예정된 이별은 이 순간이 지나면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해야만 하기에 예상치 못하게 갑자기 찾아오는 이별과는 다른 의미로 아프다. 내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준 사람, 내게 사랑의 힘으로 따뜻한 세상을 보여준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건 너무도 슬픈 일이겠지만, 어미 새에게 나는 법을 배운 새끼 새가 때가 되면 둥지를 떠나 저 멀리 날아가듯이 우리에게도 단지 그런 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뿐이다.

 

클레오와 공항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글로리아의 모습은 클레오가 느꼈던 글로리아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클레오가 사랑하는 글로리아를 만나러 갔다가 자기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하는 글로리아의 관심과 애정에 상처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클레오에 대한 글로리아의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클레오가 이 사랑을 바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어른으로 자라날 것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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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우리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서울에서 지내다가도 종종 대구집에 내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헤어질 때만 되면 할아버지는 목에 큰 수건을 두르고 배웅을 나오셨다. 그러고는 짐을 싣고 출발하는 우리 차 뒤에 서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해서 수건으로 닦아내셨다.

 

나는 아직도 차 뒷유리에 그려진 검은 줄 사이로 점점 작아지는, 훌쩍이며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분명 다음에 또 볼 수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까지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여다보며 자식보다 더 예뻐라 했던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방이 너무 허전해서였을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극장에 가만히 앉아 그때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보다가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헤어질 때 그 누구도 그때처럼 울지 않는다. 내가 일곱 살 때 서울로 올라오시면서 예전보다 만남이 더욱 익숙해지기도 했고, 작고 귀여웠던 나도 이젠 징그러울 만큼 커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언젠가 더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영영 못 볼 사람들처럼 그렇게 눈물을 쏟곤 했던 지난날이 그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 사랑을 신뢰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직 나만을 사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던, 그래서 그분들의 세계에는 나밖에 없다고 믿었던 순진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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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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