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기억을 담그다

글 입력 2023.11.05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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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과는 달리, 그 당시 아빠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죽여 슬퍼하셨다. 장례식을 마친 뒤 며칠간 방문을 열면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아빠의 침묵한 등을 볼 수 있었다. 활짝 문을 열며 명랑한 목소리로 "아빠 뭐해?!"라고 말을 건네려던 참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을 여의어 보지 않은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쉽게 다루기 어려운 감정이었으니까. 그때마다 나는 열었던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다시 닫아야 했다.

 

닫힌 문을 사이에 두고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아빠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음식이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

   

 

 

김치에 담긴 기억


 

그런 깨달음을 얻었던 것은 대략 2년 전, 11월 김장철이었다. 어릴 적부터 먹어온 김치는 항상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손맛까지 담겨있었다. 설날과 비슷한 명절처럼, 김장할 때가 되면 할머니 댁으로 삼삼오오 모이는 일이 일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편찮으시기 시작할 무렵, 함께 모여 김치를 담그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할머니 댁에 방문하기보단, 병원으로 찾아뵙는 일이 더 잦아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친척 가족들은 각자 집에서 알아서 김치를 담가 먹게 되었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 처음으로 절인 배추와 재료들을 준비해 거실에서 소소하게 김장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그간 김치를 사 먹었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는 호기로운 목소리를 앞세워 김장에 대한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리 집도 올해엔 직접 김치를 담가볼까?" 매번 사 먹을 수는 없다는 게 아빠의 의견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난생처음 먹기만 해왔던 김치를 담그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절대 순탄치만은 않았다.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절인 배추를 하나씩 옮겨 속을 채우는 일까지. 그동안 젓가락질 한 번으로 김치를 먹었던 것과 비교해 보자니 뒷배경과 어른들, 특히 대부분의 일을 맡으셨던 할머니가 사뭇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중심을 지키시며 김치라는 음식 하나로 가족이 모일 수 있던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그 영향을 늦게나마 알게 된 것 같았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늦은 저녁, 어느 정도 숙성된 김장 김치를 보쌈과 함께 먹자던 가족의 부름에 낮잠에서 깼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김장 김치에서는 내가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맛이 아삭하게 씹혔다. 온통 새빨간 고춧가루와 양념으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막상 맛을 보면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겉돌지 않고 깊이가 있는. 할머니의 양념장.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 입맛이 기억하던 김치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아빠, 이 김치 옛날에 할머니 댁에서 담갔던 김치 맛이랑 똑같은데? 진짜 맛있다!" 보쌈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으며 말하자, 부모님도 김치를 드시곤 놀라셨다. 알고 보니 우리 가족 모두가 먹고 싶어 하던, 기억에 꼭 들어맞는 김치였다.

 

 

 

사람에게 묻은 사랑의 습관, 기억

 

기억에 관한 영화 중 꼭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매 겨울이면 한 번씩 꺼내 보는 영화인데 제목은 ‘이터널 선샤인’이다. 영화에선 짐 캐리가 연기하는 주인공 조엘이 클레멘타인과 연인 사이다. 하지만 긴 시간 교제 끝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반대의 성격임을 깨닫고 이별을 결심한다. 이에 둘은 기억을 삭제해 주는 곳, 라구나 사에 가서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노력한다.

 

영화는 가장 최근부터, 천천히 과거를 거슬러 가며 지워져 가는 조엘의 기억을 한 에피소드씩 비춘다. 남자주인공 조엘은, 가장 최근 시점부터 연애 초반으로 시간을 거슬러 갈수록 지워져 가는 기억에서 클레멘타인과 애틋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른다. 결국 지워져 가는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한 노력을 이어간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기억을 지운 두 사람을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아무 정보가 없음에도, 둘은 같은 장소에서.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서로에게 끌려 연인이 된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끌림’을 사랑,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본능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은 아무리 애를 쓰고 돌아가려고 해도 바른길로 가려는 마음. 또 억지로 지워낼 수 없는 것이며 사람에게 하나쯤은 묻은 오랜 습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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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과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워도 당연하듯 서로에게 끌린 것과 같이, 그때 부모님의 손에는, 예전에 김장 김치를 위해 만들었던 할머니의 양념장이 오랜 습관처럼 그대로 묻어있었다. “청강을 넣어서 맛이 비슷한가?” 우리 가족은 그날 김치와 보쌈 고기를 함께 먹으며 맛이 비슷한 원인을 하나씩 기분 좋게 찾아냈다. 그와 함께 옛이야기들도 하나씩 꺼냈다. 가령 김장철에 할머니 댁에서 어떻게 김치를 담갔는지와, 내가 그때 너무 어려 알지 못했던 할머니와 가족들의 이야기 등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머금은 아빠의 모습에 나는 그 식사 시간이 참으로 고마웠다. 결코 희미해질 수 없는 사랑으로 희미해지던 애틋한 기억이 다시금 선명해진다. 습관처럼 여기던 모든 삶의 방식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음이 사뭇 신비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코끝 시린 겨울이 문을 두드리며 찾아올 때면,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그리고 오랜 시간 후 기억에서 찾은 김장 김치가 떠오른다. 그리고 할머니를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슬픈 사실로부터 점차 무뎌지고 희미해지는 기억과는 별개로, 사랑은 결코 희미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그리는 사랑처럼 말이다. 아직 이 신비로운 마음을, 나는 다시 김치와 함께 넣어두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되어 더욱 깊어지는 맛으로 언젠가 할머니께 꼭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정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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