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암호를 속삭이는 시간들 [영화]

글 입력 2020.11.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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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 몇 편 있었다.

 

연애를 시작할 때 감정보다는 머리 아픈 조건들을 앞세워 따져보곤 하는, 무엇 하나 쉽사리 사랑하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는 마냥 낭만적이고 철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테지만 그만큼 보는 이의 마음을 말랑하게 만든 강력한 영화였다는 말도 된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컬렉션에는 모두가 명작이라 칭송하는 영화보다는 다소 독특한 매력 탓에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품들이 주로 들어가곤 했는데, 이어 소개할 폴 토마스 앤더슨 (이하 PTA) 감독의 로맨스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2002)는 그 리스트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계기였다.


 

Punch-drunk

 

1. (권투 선수가 연타를 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그로기 상태인

2. 혼란스러워하는, 정신을 못 차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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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주인공 배리(아담 샌들러)를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사무실을 배경으로 막을 올린다. 긴 사무실의 한쪽 구석 끝에 몰려있듯 앉아 항공사 직원과 통화하는 그는 위축되어 보임과 동시에 비정상적인 부분에 집착하는 다소 강박적인 첫인상을 남긴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는 그는 사실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다.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참견 많고 말 많은 일곱 누나에게 둘러싸여 자란 탓에 배리는 내면을 드러내지 못하고 감정을 쌓아두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사무실 옆 카센터에 차 키를 전해달라며 붉은 옷을 입은 여자가 찾아온 어느 날, 마치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는 그의 불안정함을 보여주듯 사무실 앞 도로에서 난데없이 추돌사고가 벌어지고 그보다 더 뜬금없는 풍금 한 대가 도로 한복판에 놓인다.

 

배리는 그 정체 모를 풍금을 자신의 공간에 들여놓기로 결심한다. 비록 '책상 위'라는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에 올려두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사무실 한가운데에 놓인 풍금은 이곳저곳 손을 봐주자 곧 삐거덕대며 소리를 낸다.


"의사들은 비밀 지켜주잖아요, 그렇죠?", "내 얘기.. 비밀로 해줄 수 있어요?", "남들에게 말하지 말아요, 알겠죠?" 배리가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대사들이다. 일곱 누나 밑에서 자라면서 숨기고 싶었던 것들은 모조리 누나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린 탓에 그는 유독 비밀에 민감하다. 별거 아닌 일일지라도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분노가 폭탄처럼 터졌던 순간마다 어김없이 그 트리거에는 비밀 누설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형부, 막냇동생, 심지어는 폰섹스 회사까지도 그 부탁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비밀을 무참히 발설한다. 지켜달라는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한 사람, 레나(에밀리 왓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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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숨기면서 친해지기는 싫다는 말을 앞세운 채 피하고 싶은 질문을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그녀는 배리에게 무척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그는 벽 뒤로 숨고 화장실로 피하며 숨을 골라야 한다. 그러나 다그치지 않고 그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레나는 배리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판촉 행사에서 주는 쿠폰의 마일리지를 이용해 평생 비행기 표를 사지 않겠다는 황당한 궁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때때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등을 다독여 준다. 그녀를 통해 배리는 자신이 왜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많이 울었는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벽을 부수고 흐느끼며 풍금을 어루만지는 장면은 그가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변곡점이다. 곧바로 길을 찾지는 못했지만 끝내 문 앞에 서자,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열린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따위의 흔한 밀고 당기기는 역시나 없다.


와이키키 해변에서의 달콤한 재회를 지나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괴하다.

 

 

"당신 얼굴은 쇠망치로 묵사발을 만들고 싶을 만큼 귀여워요."

"난 당신 얼굴을 씹어먹고 눈알을 파내 빨아먹고 싶어요."

"바로 이거예요, 너무 근사해요"

 

 

감히 영화의 아이덴티티를 함축시킨 대화라 칭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남들 귀에는 괴상하고 정신 나간 소리로 들리든 말든 간에 그들은 둘만의 외계어로 사랑을 속삭인다. 오히려 듣는 이 없는 밀담은 더욱 달콤하기 그지없다.

 

훗날 배리는 레나의 품에 안긴 뒤 다급하게 중얼거린다. 푸딩을 사면 나오는 마일리지를 모아 이 세상 어디든 당신을 따라가겠다고. 여행을 다니지 않아 비행기는 처음이었던 남자가 비행기는 백 번도 넘게 타봤다는 여행광 여자를 위해 했을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고백이다. 그 말들이 레나에게 얼마나 사랑스러웠을지 생각해보면, 영화 초반부 부족한 모습의 배리를 보며 관객이 가지게 되는 의문은 자연스레 해소된다.

 

두 사람의 조화는 필연적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안성맞춤인, 또는 안성맞춤이 되어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기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자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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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두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로 영화의 불친절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 그러하듯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역시 PTA 감독은 여러 설명을 과감히 생략한다. 흔히 로맨스 영화의 합격선이라 일컬어지는 주인공의 감정선에 대한 관객의 이해 따위는 전혀 구하지 않고 서사를 진행시킨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때로 닥치는 대로 물건을 부수어야 성이 풀리는 저 난폭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레나가 왜 좋아하는 건지 알아서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PTA 감독은 그를 설명하기보다는 강렬한 미학적 경험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쪽을 택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불친절은 호의 이유로도 꼽히곤 한다. 앞서 설명한 두 사람의 필연적인 로맨스 외에도 영상미와 같은 감각적 요소 역시 PTA의 강력한 설득력으로 작용하는데, 배리가 항상 입고 있는 양복의 색이자 우울(blues)을 의미하는 파랑, 레나를 상징하는 색인 빨강을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두 사람의 사랑을 시각화한다.

 

오프닝과 엔딩의 경계에 삽입되는 제레미 블레이크의 아트워크는 두 색의 혼합을 보여줌으로써 색에 대한 이목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봉준호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약을 하는 것 같은' 몽환적인 감각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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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본적으로 렌즈의 결함에 의해 빛이 반사되거나 산란되어 원래 없는 허상이 나타나는 현상인 렌즈 플레어 현상을 비주얼적 요소로 이용하여 미학적 즐거움을 더하기도 했다.

 

영화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마주하던 순간, 온전히 하나가 되는 엔딩 신 등 두 인물이 사랑을 느끼는 순간에 의도적으로 파랑과 빨강의 렌즈 플레어를 넣어 영상미를 극대화한다. 이러한 시각적 효과에 더불어 때맞추어 얹어지는 존 브리온의 사운드트랙은 마치 누군가의 환상을 통째로 엿보는듯한 PTA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데에 힘을 실었다.

 

정신없고, 불안정하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하지만 분명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인 이 영화, 모두에게 자신 있게 소개할 수는 없으나 만약 함께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한없이 마음을 열게 되는 '펀치 드렁크 러브'.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 영화를 사랑할 줄 아는 이와는 왠지 어디로든 함께 달려 나갈 수 있을 듯하다.

 

 

[김수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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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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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uecat
    • 펀치드렁크러브의 저 장면,,!제 노트북 배경화면인데 반가운 마음에 들어왔네요 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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