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아라베스크 : 제가 당신을 다 알 수는 없어요.

우리는 상대를 다 알 수 없어요. 단지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지요.
글 입력 2020.11.11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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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대학로 선돌극장에서 극단 ‘놀땅’은 ‘아라베스크’라는 제목의 연극을 진행하였다. ‘아라베스크’는 ‘아라비아풍(風)’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벽면, 아랍의 건물이나 공예품의 장식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랍의 독특한 문양을 지칭한다.

 

 

 

왜 ‘아라베스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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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사건이 있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라고 불리는,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자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피해 대한민국의 제주도로 향한 사건이다.

 

갑작스레 다수의 난민이 대한민국에 오고자 했던 이유는, 한국에는 난민법이 제정돼있어 이론적으로는 난민의 입국이 비교적 쉬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제주였는가. 당시 그 난민들은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었는데, 말레이시아로부터 체류 허가를 갱신받지 못했던 찰나, 제주행 항공편이 비교적 저렴한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본 연극에서의 ‘난민’은 본인이 자국에서 건축업에 종사하였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세 번째 난민 조사에서는 이를 증명하려 하듯이, 본인의 정보가 기록된 A4용지 여러 장을 바닥에 놓아 아라베스크 문양을 만든다.

 

아라베스크의 의미를 설명하며 문양을 만들어 보인 후, 한 장을 집어 들어 반으로 찢고서는 본인의 아라베스크는 끊겨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저는 서울 돌아가면 고시원 쪽방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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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國家)의 ‘가(家)’ 자는 ‘집’을 의미한다. 이는 한국 국민의 인식 체계 속 대한민국은 커다란 ‘집’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당수의 한국인은 ‘예멘’이라는 국가에 대해 잘 모른다.

 

대중에게 한국과의 교류가 뚜렷하게 알려진 국가도 아니고, 그들의 ‘국교’인 ‘이슬람교’는 한국에 신자가 거의 없는 종교이다. 거의 없는 것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긍정적으로 인식된 종교가 아니라는 점은 사실인 듯하다. 더욱이, 예멘은 종교활동이 일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이지만, 대한민국은 ‘국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종교인’이 가장 많은 국가이다. 멀리에 있는 미지의 ‘전쟁 중인’ 국가, 거기에 커다란 문화 차이는 한국인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대한민국을 떠나서 전 세계의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우리 집이 불에 타버렸으니, 저에게 방 한 칸만 내주실 수 있나요? 집이 다시 지어지면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묻는다면 쉬이 고개를 끄덕이긴 힘들 것이다. 그것도 이웃 동네여서 한두 번 정도 마주친 사이도 아니고, 저 멀리 떨어진 동네로부터 배나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 동네가 내걸은 '우리는 재난피해자들을 보호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온 것이기에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긴 하지만, ‘굳이 왜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몰이해의 감정은 아라베스크 연극 중 ‘보조’의 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보조’의 인물 설정은 난민사무국의 3개월 계약직. 그는 난민의 ‘임시 거처’에 소파가 있다는 것에 기겁한다.

 

“저는 서울 돌아가면 고시원 쪽방에 살아요.” (인물의 대사는 필자의 기억에 근거한 것으로, 실제 시나리오와 조금은 다를 수 있다는 점 유의해 주길 바란다.)

 

‘난민’이라는 이유로 본인보다도 더 좋은 거처를 ‘임시 거처’로 삼고 있다는 것에 억울함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이 생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의 국가는 나의 집. 나의 집이 외부인이 아니라 나를 우선으로 여기고 나를 먼저 보호해주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난민다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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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불에 탔다고 해서 무조건 화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화상을 입기 싫어서 일찌감치 자가(自家)에서 탈출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화재피해의 ‘흔적’이 없다면 ‘재난 피해자다움’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모두가 전쟁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전쟁피해를 입기 싫어서 일찌감치 자국(自國)에서 탈출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전쟁피해의 ‘흔적’이 없다면 ‘난민다움’을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당신은 내가 더 불행하기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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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다움’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전쟁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무엇일까. 물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버린 상태라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전쟁피해가 최소화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난민은, 한 다리가 부러지거나 온몸에 화상 상처를 입은 난민이 아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해를 입지 않은 온전한 이가 가장 이상적인 난민이다.

 

한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나라의 국민 누구라도 피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운이 좋아 외적인 상처는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내면의 상처는 받게 된다. 하지만 ‘난민다움’이란, 전쟁피해의 흔적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인정해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극 중 ‘통역’의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난민이라면 좀 도와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요. 온몸이 멀쩡하잖아요."

 

그렇다면, 마흐무드는 '난민다움'을 인정받기 위해서 한 다리가 부러진 상태이거나, 온몸에 화상을 입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서가 아니라, 먼 바다를 헤엄쳐 오거나, 조그마한 보트에 타고서는 노를 저어 왔어야 했을까?

 

난민답지 못한 난민도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지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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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사안을 아주 중립적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 깊었다. ‘중립’의 매력은 한 사안에 대하여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모두 사고해볼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것에 있다. 본 연극의 중립성이 더욱 빛을 발하게 한 것은, 대개가 그렇듯이 한 인물은 난민 수용에 찬성하고 다른 한 인물은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태도를 관철하지 않았던 설정이었다.


극 중 등장인물은 난민 마흐무드(알도사리 압둘라 役), 조사관(이준영 役), 보조(송치훈 役), 통역(박다미 役) 총 네 명이다. 네 인물 중 난민을 제외하자면 모두 하나의 고정된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은 않는다. 조사관이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생각을 보이면 통역은 반대한다. 보조가 난민 수용에 찬성하는 주장을 하면 조사관이 반대하는 태도를 보인다. 조사관과 보조와 통역이 난민을 몰아세우면 난민은 본인이 겪은 사건을 하나씩 풀어나가며 호소하고, 직원들은 숙연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난민 수용에 관하여서는 많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만을 단정 지을 수 있다. 무조건 찬성할 수도 없으며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다. 물론 모든 인문사회적인 사안이 그러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복잡하다고 하여 회피만 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복잡할수록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 본 연극은 그 사색을 돕는다.

 

 

 

‘아라베스크’ 연극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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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배우들의 격한 감정 표현은 나로 하여금 감정의 정화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소리 지르고, 답답해하고, 의심하고, 슬퍼하며, 그러다가 웃고, 농담한다. 연극의 내용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보아도 그 자체의 예술성 역시 뛰어났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어린이극장에 한두 번 가본 것을 제외하자면, 또 중고등학교 시절 단체로 본 것을 제외하자면, 필자에게 본 연극은 처음으로 극장에서 보았던 연극이었다. 대학로라는 지역도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그러나 연극은 종종 보았던 영화나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문화였다.

 

물론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문화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항상 강조하듯 필자에게 예술은 우열이 없는 공간이다. 다만 연극은, 내가 배우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의 결이 다른 예술 분야와는 완전히 달리한다는 것이다.

 

연극은 필자에게 첫째로는 현장감을 주었고 둘째로는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를 안겨주었으며, 셋째로는 사색의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연극은 감정의 무지개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70분의 짧으면서도 길었던 시간이 나에게 안겨준 이 현장감과 감정의 정화 그리고 사색의 기회는 너무나도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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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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