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Sinn)의 혁명] 무너진 둑은 그대로 무너져있기 마련 – 영화 '벌새'

어정쩡한 무게의 상처에 관해
글 입력 2020.10.30 19:06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common (1).jpeg

 

 

 

1. 도지마롤


 

[1] ‘스위치를 껐다.’ 에너지가 요구되는 일들에서 당분간은 손을 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결정이다. 사람을 공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것들이라면 뭐든, 당분간 손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사람을 향한 애착을 떨구기 어려운 본질을 가졌으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방어적이고 냉소적인 성향도 강한 편이라 균형점을 찾기 까다로운 체질이다. 예민함을 억누르려는 기제일지도 모른다.

 

[2] 주기별로 꽂히는 디저트가 달라진다. 얼마 전까진 에그타르트였는데, 이번에는 도지마롤이다. 아무래도 생크림 무덤에 정신이 팔린 듯하다. 기숙사 ‘운명공동체’로 분류된 사람 중 한 명인 L씨가 학교 근처 빵집에서 도지마롤을 구매했다고 카카오톡 채팅방에 선언하던 그 날. 나는 기획 기사 초고를 작성하기에 바빠서 롤을 커팅하는 현장에는 참석(?)하지 못했었다. 다행히도 인심 좋은 두 명의 배려로 내 몫만큼 남은 도지마롤을 다음날 건네받을 수 있었고, 열심히 롤을 휘적거리며 기사를 작성했다. 유독 그때가 힘든 날이었다. 기사 때문에 얻었던 스트레스도 컸지만, 그보다는 개인적으로 나를 골머리 썩게 했던 다른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어쨌거나 도지마롤과 함께 소설의 늪으로 빠져버린 날 이래로, 카스테라를 연상케 하는 빵의 표피와 표피 안쪽을 메우는 그득한 생크림이 계속 내 눈앞에 아른거렸던 탓에 도무지 먹지 않겠다고, 거부할 수가 없었다.

 

 

 

2. ‘벌새’ 속, 은희의 시간


 

언젠가, 감정이 허무로 가득 찼던 와중 영화 ‘벌새’를 본 기억이 있다. 몇 달 전 일이었다. 화면 속,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일상을 버티고 있던 은희를 봤다. 동시에 은희의 모습에서 나를 봤다. 색깔을 잃어버리고 있던 중학생. 무너진 마음의 둑을 안고 살아가는 어설픈 여자아이.

 

은희는 열다섯 살이다. 학업에는 별 의욕이 없다. 친한 친구도 몇 없다. 뜬금없이 한문 학원에 다닌다. 꽤 염세적인 편이고, 비속어를 곧잘 쓴다. 그렇지만 연애와 콜라텍처럼,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으레 이끌리는 놀잇거리를 똑같이 즐길 줄 알았다. 자기를 둘러싼 보편의 세상에서 조금 벗어나곤 했지만, 그래도 은희는 열다섯 살이었다. 존재감은 빈약했지만, 그래도 은희는 누구 말마따나 사슴 같은 눈을 가진 중학생이었다.

 

그렇지만 은희는 응어리를 분출할 때보다 삼킬 때가 많았다. 대치동에서 비싼 교육을 받았던 언니,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살아가는 오빠의 그늘에서 아이는 언제나 경계를 서성였다. 아이는 친구들 앞에서 장난기 어린 비속어를 뱉으며 소위 ‘센 척’을 일삼았다. 집에서는 정반대였다. 반항적인 목소리와 태도는 여전했지만 그게 아이의 원초적인 기질은 아니었다. 일상적인 싸움과 남매 간의 신경전이 오가는 가운데 부모님의 눈치를 보면서 부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아이는 목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특출하게 뛰어난 재능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민폐를 끼치지는 않는 수준으로.

 

괜찮냐는 물음은, 그렇다고 대답하라는 얼마간의 강요를 동반한다. 누구도 그게 도의라고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은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표출할 권리가 자기에게 없음을 알았다. 은희의 사정은 분명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니 말이다. 정말로, 객관적으로 무언가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떡집 장사를 하는 부모님은 은희에게 노란색 중고가 가방을 사줬고, 은희의 학비와 수술비를 큰 어려움 없이 대줬다. 거한 애정을 받진 못해도, 무관심으로 방치되지는 않았다. 맛있는 녹두전을 구워주는 어머니, 얼굴 근육에 무리가 올 수도 있다던 의사의 말을 듣고 거하게 울어줄 아버지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감정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 대놓고 나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쌓이는 감정들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했기에, 은희는 점점 방어적인 아이가 돼 갔다.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버려가면서. 바깥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 채, 별 볼 일 없이 내성적인 아이로 정체화되곤 했다.

 

부모님이 싸웠던 밤, 은희는 할큄이 난무하는 말들을 목격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입힌 물리적인 상해도 목격한다. 은희의 얼굴엔 번민과 상처가 가득했다. 하지만 침묵했다.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은희의 역할은 폭력의 방관자가 되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삼키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부모는 언제 싸웠냐는 듯 거실 소파에 앉아 예능 프로그램을 즐겁게 시청한다. 아버지의 팔엔 상처를 수습하기 위한 거즈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은희의 상처에는 이미 소독 없이도 딱지가 졌다. 항상 그래왔듯 아이는 스스로 괜찮아져야만 했었다. 거즈를 붙여줄 누군가가 부재한 상태에서 말이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자신을 줄곧 따라다니던 후배에게서 매몰찬 반응이 돌아왔을 때, 은희의 동공은 당혹감과 부끄러움으로 잔뜩 흔들렸다. 삐뚤어진 척, 시니컬한 척 매사에 일관하다가도, 관계가 깨어지는 순간에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미숙함. 오빠의 폭행에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오빠가 겪는 부담감을 읽어내는 미련함. 소 닭 보듯이 지내는 언니가 성수대교에서 죽었을까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언니에게 빨리 연락하라고 부모를 독촉하는 다정함. 강요받은 인내심에서 비롯된, 그런 조마조마한 감정의 상흔들이 딱히 남 일 같지 않아서 손톱만 자꾸 만져댔다.

 

 

common.jpeg

 

 

 

3. 둑이 무너진 채, 시간은 멈추고


 

저것 참 난감하겠네. ‘어정쩡한’ 결핍에 시달리는 아이는 반항의 정도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의 정도도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은희가 그랬고, 나도 그랬다. 내면을 지탱하는 둑도 그렇게 어정쩡하게 무너진다. 완전 착한 아이도, 완전 나쁜 아이도 아니었다는 기억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도 자기 자신을 사로잡아 그 어정쩡했던 시간 속에 스스로를 여전히 박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나, 생각해보면 그렇게 부족한 건 없었는데. 그런데, 힘들긴 했어. 그건 정말이었어. 이런저런 이유들이, 나를 괴롭게 했어. 분명 나는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지만 말이야. 그렇다면 난, 뭐지? 실체 없는 어정쩡한 원인들로 무너져버린 내 둑은 도대체 무엇으로 다시 쌓지.”

 

죽을 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죽을 수도 있었다. 삶을 살아가지 않아야 할 결정적인 원인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을 꼭 버텨야 하는 희망찬 동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벌새’ 속 은희의 시간은 분명 저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슬펐던 이유는 은희의 어정쩡하지만 형태가 분명한 상처의 굴레 때문이기도 했으나, 아이가 커서도 평생 저 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둬둘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기도 했다.

 

*


추가하지 못했던 메모 하나.

 

[3] 강박적으로 단 것에 집착하는 습관은, 적어도 당분간은 고치기가 꽤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습관의 기원은 높은 확률로 내적 결핍에 있을 터였다. 스트레스와 불안. 태생적인 자존감 부족으로 인한 강박 관념. 많은 현대인이 시달리고 있는 질환인 만큼 누군가는 그것 정도야,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잠깐의 예민함이라 치부하며 넘어가기도 하겠지만 나처럼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에 염세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에.

 

그런 연유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지도 빈약하다. 수많은 은희들의 결말은 나와 비슷할 확률이 높다. 우리는 애매한 상흔을 간직하고 있는 탓에, 목소리마저도 애매하게 낼 수밖에 없다. 버틸 수 있는 듯한 무표정으로 삶의 변두리에 서 있는 것밖엔 도리가 없다.

 

어쨌거나, 그런 강박감을 견디기 위해 습관적으로 단 음식에 집착하는 편이다. 이런 기질이 결과적으로 신경 쇠약과 영양 부족에 결정타를 날린다고 하니 언젠가는 고쳐야겠지만, 이것마저 포기하면 삶을 ‘그래도’ 살아가야 할 이유 중 하나를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차라리 정신적 안락함을 고려하는 일이 나에게는 더 실효적이지 않나, 라는 판단이 서기도 한다.

 

 

131.jpg

 




[이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9437
댓글1
  •  
  • kamelo
    • 명확한 삶의 의지가 흐려지고, 그 상태로 삶을 지속하는 고통 아닌 고통을 가진게 은희 아닐까요. 죽을 이유도, 살 이유도 없는 희미한 상태에 도달한 주인공은 많은 이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정신적 안락함을 찾는다는건 '나는 이정도로 됐어'라고 결론내는 모습일거라 상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닿지 못하는 희망과 떨어지지 못하는 절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생각을 죽여버리는 과정일테죠.
    • 0 0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