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 인터내셔널의 밤 [문학]

글 입력 2020.09.3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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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책은 박솔뫼 작가의 중편소설 『인터내셔널의 밤』이다. 박솔뫼 작가는 200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하여 현재도 소설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수영하는 사람」, 「달리기 수업」 등의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다. 나는 그녀가 올해 발표한 두 작품 모두 읽어보았는데, 굉장히 일상적이고 따뜻하면서 너무나도 재치있는 문장들에 매력을 느꼈다. 자고 일어나서 무언갈 먹고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아와 노곤해져서 다시 잠드는,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지루하지 않게 착착 진행되는 서사가 한편으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극적인 사건 없이 아주 평범한, 자연발생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이어지는데, 그 장면들을 이어주는 글솜씨가 굉장히 치밀해서 빈틈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의 충격적인 인상이 나를 『인터내셔널의 밤』으로 이끈 것 같다. 『인터내셔널의 밤』 역시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고, 한편으로는 훌륭하기까지 하다. 단편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더 자세하게 제시되고, 다양한 사건들이 극적으로 연결되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등장인물들은 커다란 감정의 격변 없이 찬찬히 생각하고 서로 만나고 낯선 지역을 걸어 다닌다. 작품의 시간이 흐르며 인물들의 과거, 기억, 상상이 교차되어 등장하기도 하고, 이러한 서술 방식은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더욱 생생한 장면들을 전달해 준다.


『인터내셔널의 밤』은 부산행 KTX에서 우연히 만난 한솔과 나미의 이야기이다. 각자의 사정으로 부산으로 향하는 길, 나미는 한솔에게 창가 자리를 양보해줄 수 있냐고 부탁한다. 이 인연을 통해 두 여성은 부산에서 만남을 이어간다. 한솔은 숙소에 머물고, 나미는 이모의 친구인 유미의 집에 머문다. 그들은 부산의 거리를 거닐며 낯선 광경을 마주하기도 하고 모여서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한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서 이 인물들의 다양한 경험들이 이 소설을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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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와 한솔, 그리고 유미가 함께 터미널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나미는 품에 안고 있던 도넛 상자를 열어 양옆의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넸다.(p.78)

 


이 장면은 그려지는 방식이 정말 흥미롭다. 이 장면에서 “도넛”이라는 소재가 부각되어서 보인다. 문장에서는 단순한 보통명사로서 제시되지만, 나미가 이 도넛을 다루는 방식과 작가의 묘사 속에서 이 도넛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에 그려진다. 일단 이 도넛은 비닐 봉투가 아니라 상자에서 나온다. 도넛 상자에서 등장할 수 있는 도넛은 일반적인 제과점에서 파는 도넛이 아니라, 던킨 도넛이나 크리스피 크림 등과 같은 도넛 전문점에서 판매하는 도넛일 것이다.

 

상자 속에 여섯 개 혹은 열두 개의 도넛이 정갈하게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결국 여기서의 도넛은, 나미라는 여성 인물이 자신의 아담한 품에 커다란 도넛 상자를 안은 채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건네는 도넛 전문점의 도넛일 것 같다는 구체적인 인상이 든다. 반면에 한솔과 유미는 “양옆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되어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이름이 밝혀진 인물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결국 이 한 문장 안에서는 구체적인 인물들이 일반적 대상으로 추상화되고 오히려 보편적인 도넛빵이 구체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재미있는 이유는 전경(前景)과 배경(背景)이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추동시키는 인물들이 배경으로 전락하고 도넛이 생생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이 상호작용하며 서사가 진전되는 상황에서, 인물이 아닌 도넛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작가의 재치가 나는 반갑다. 여객터미널에 앉은 세 사람은 도넛을 나누어 먹으며 눈앞의 거대한 선박들을 바라본다. “크고 희고 왜인지 그립고 설레는 기분이 들게(p.77)” 하는 선박들과 달달한 도넛을 꺼내 먹는 모습은 거대한 현실을 뒤로 하고 모인 이 인물들의 처지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광활한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여객선들과 터미널에 앉아 이 광경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뒤통수. 그리고 표면의 글레이즈가 달짝지근하고 식감이 부드러운 도넛의 맛. 이따금씩 머릿속에 재생시키고 싶은 장면이다.


소설은 재밌어야 한다.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비유와 상징을 달달 외우면서 억지로 문학작품을 외우던 수준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취미로 소설을 읽고자 한다면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국어 교과서와 보수적인 문학자들은 문학이 간직한 사회적 메시지와 미학을 온전히 파악할 때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극도로 이룩된 오늘날, 정보는 빛의 속도로 전달되고 다양한 영상을 손 안에서 골라볼 수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미학과 메시지성이 얼마나 유효한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대중문화 향유층이 넷플릭스와 유튜브로 옮겨간 상황에서, 소설은 오히려 가장 작은 문장의 수준으로 돌아가 소설이 선보일 수 있는 매력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에서 박솔뫼의 이런 문장들이 반갑다. 카메라 렌즈에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문학적인 재치들이 『인터내셔널의 밤』에 담겨 있다.


*


소설의 초반부로 돌아와 작가의 목소리가 친근하게 들리는 부분을 뽑자면 이 부분을 뽑고 싶다.


 

그도 다른 옛날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면 시간이 지금과 상관없이 다른 속도로 흐르는 것이 좋았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다른 시간 속에서 친구를 만났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때로 곤란한 상황을 견디게 해주었는데 그런 순간들을 위해 그에게는 몇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몇 가지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었다.(p.14)

 


이 부분에서는 한솔의 심리가 서술자의 발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 부분이 굉장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저러한 사고의 주체는 한솔이고 이걸 전달해주는 사람은 서술자인데 어쩐지 작가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책의 14페이지에 나오는 문장들이니까 독자가 주인공에 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한 시점의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인물이 어린 시절에 책을 좋아했던 이유를 저렇게 자세히 말해주니, 아무래도 저 이야기는 한솔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 박솔뫼의 목소리인 것만 같다. 나에게 있어서 저런 부분은 굉장히 메타적으로 느껴졌고, 이것 역시 박솔뫼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책을 읽으면 다른 시간을 다른 속도로 흐른다는 표현이 굉장히 인상 깊다. 문학이라는 예술 장르는 시간의 주도권을 감상자가 가진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작가가 소설을 창작할 때 문장의 호흡 정도는 조절할 수 있겠지만, 결국 책을 어떤 속도로 감상할지의 선택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 있다. 모든 독자는 자신이 시간 들여서 천천히 읽을 ‘자신만의 장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 공연예술을 비롯해 서사성을 가지는 장르 중에서 감상자가 시간 조절을 할 수 있는 장르는 소설이 거의 유일하다. 이야기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한다는 것은 각 장면의 임팩트를 감상자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읽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인상 깊게 느껴지는 장면이 모두 다를텐데, 소설의 시간을 독자 스스로 주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은 한없이 길게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싫어하는 장면을 빨리 넘길 수도 있다. 결국 소설을 읽는 행위는 자신만의 속도로 시간을 보내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소설을 읽을 때 비로소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하더라도 나의 시간은 세계의 시간과 동일하게 흐른다. 여행지에 있더라도 세계의 물리적인 질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같은 시간이 흐르고, 그래서 SNS와 카톡으로 일상과 여전히 연결돼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탈이 아니다. 그러나 책을 읽을 때는 원하는 대로 시간이 흐른다. 서사의 속도는 독자의 수중에서 결정된다. 심지어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다면 책장을 앞으로 넘겨 사건을 다시 재생시킬 수도 있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고 책을 읽는 시간에 비로소 나만의 시간 속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박솔뫼 작가가 적은 문장은 소설 읽기만의 매력을 메타적인 목소리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


박솔뫼의 소설은 명확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이 세상의 이야기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박솔뫼는 다만, 소설의 방식으로서 이 세상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그녀는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가장 작은 단위의 연대를 보여주고 있다. 길을 걷고 말을 걸고 세상의 풍경을 보는 것. 이 사소한 노력들에서부터 역설적으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인터내셔널의 밤』은 다양한 관점에서 읽힐 수 있는 책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장과 문체의 차원에서 보아도 재미있고, 각각의 인물이 그려진 방식, 이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보아도 좋다. 좀 더 논의의 폭을 넓혀, 여성 주인공들이 소통하는 장면들을 젠더적 관점에서 읽어보아도 재미있을 것이다. 『인터내셔널의 밤』이 너무 부담스럽다면, 올해 발표작인 「수영하는 사람」이나 「달리기 수업」도 좋다. 「수영하는 사람」은 《문학과 사회》 2020년 봄호에서, 「달리기 수업」은 웹진 《비유》의 2020년 4월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은 간식이라도 먹으며 자신만의 시간 속에서 소설을 만끽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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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솔뫼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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