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주 평범한 회복의 과정, '룸' [영화]

상처의 자극보다는 회복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글 입력 2020.09.1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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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돌부리에 넘어져 살갗이 까진 상처에도 회복이 길다. 최소 일주일은 있어야 울긋불긋한 새 살이 돋아날까 말까 하고, 이마저도 운이 안 따라주면 흉터로 짙게 남는다. 수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만, 문득 지난날의 외상이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처음 그 상처를 마주했을 땐 먹먹하고 갑갑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럭저럭 일상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지내고 있다. 오늘은 아주 천천히, 그러기에 아주 평범하게 상처를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

해당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룸>의 5살 잭과 그의 엄마 조이는 '집'이 아닌 '룸'에서 거주한다. 그들은 식사와 배설의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3평도 안 되는 룸에서 7년째 감금당하는 중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야외로 나가보지 못한 잭은 세상의 모든 것을 고장 난 텔레비전을 통해 인식한다. 텔레비전에 나온 모든 것들을 가짜라고 알고 있었을 무렵, 조이는 이제 무럭무럭 성장할 잭을 위해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이곳에 갇혀있고, 텔레비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닉의 꾀임에 속아 감금당했고, 그로 인해 잭을 낳아 이 룸에서 키우고 있는 것이라고. 조이는 파괴된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고 잭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탈출을 감행한다.

 

조이와 함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닉을 따돌려 탈출에 성공한 잭은 세상을 마주한다. 고장난 텔레비전 화면 속의 평면적인 '가짜'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입체적인 '진짜'를 처음 보았을 때의 잭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골방 속 천장의 작은 창으로만 보이던 하늘에서 벗어나 푸르게 드리운 하늘을 처음 마주했을 때 반짝이는 잭의 눈동자를 본 사람이면 모두가 그 장면을 상기시킬 것이다. 잭이 세상에 처음 발을 내딛던 순간을.

 

영화는 탈출의 과정보다 모자의 회복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이 영화가 찬사받는 이유는 그것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둘은 극적으로 탈출해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됐지만, 그들이 7년이라는 시간을 빼앗긴 만큼 7년 동안 그들의 환경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조이의 실종 이후로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을 택했으며 조이의 어머니는 재혼을, 조이의 아버지는 멀리 이사를 떠났다. 여전히 존재할 줄만 알았던 가족의 해체, 조이는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잭 또한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가짜라고 믿었던 것과 달리 너무 많은 사람이 존재하고, 그들의 관심을 한 번에 받아 조이가 아닌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성향을 보인다. 물리적인 룸에서 탈출했지만, 정신적인 룸에 가둬지게 되는 시련이 찾아오며 모자의 안정성은 다시 한번 좌절된다. 서로만을 의지했던 과거에서 벗어나 상처를 딛고 회복할 기회가 찾아옴과 동시에 그것은 어떠한 의무로서 작용하여 둘을 심리적으로 가학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조이는 어느 방송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뜻밖의 의견을 접한다. 명백히 피해자였던 조이에게 책임을 따지는 질문이었다. '닉이 잭의 아빠인 것을 잭에게 말을 할 것이냐', '그래도 생리학적 관계에서는 아빠이지 않냐' 등의 자극적인 질문에 그를 부인하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던 조이는, '잭을 위해 잭을 포기해야 하는 게 맞지 않았겠냐?'하는 질문에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안에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처에 생채기를 입어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다 잭에 의해 발견된다. 조이의 시도로 모자는 처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지낸다. 조이는 건강을 회복하고, 잭은 사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으로. 서로가 없는 시간에 익숙해지면서 그들은 각자의 회복을 위해 천천히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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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내 장발을 유지하는 잭은 자신의 긴 머리카락이 자신의 힘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얼핏 삼손의 이야기가 생각나기도 하는 이 설정은 영화에서 잭의 성장을 보여주는 주요 오브제로 쓰이는데, 다섯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담함을 보여주는 장발 잭의 행동은 엄마인 조이를 두 번이나 구원하였으며, 극단적 시도 이후 회복을 위해 자리를 비운 조이에게 자신의 힘 샘인 머리를 잘라 전달하기로 한다. 엄마에게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이를 대신해 잭을 사랑으로 돌봐준 할머니가 손수 잭의 머리를 잘라준다. 이제는 단발이 된 잭은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i love you grandma.' 엄마 이외에 누구도 사랑해 보지 못했던 잭이 처음으로 사랑을 말한 순간이었다.

 

다시 재회하게 된 둘의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져간다. 잭은 엄마가 아닌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네 친구와 공놀이도 할 수 있을 만큼 사회에 잘 섞여들 수 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이는 자신이 아닌 타인과 어울리는 잭을 멀리서 관찰할 수 있을 만큼 안정성을 갖게 됐다. 이제 모자는 '룸'이 아닌 '집'에서 온전한 삶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까지는 아직도 오랜 시간이 소요될지도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혼자서 자립할 수 있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빌어본다. 왜냐면 머리카락은 계속해서 자라나니까.

 

<룸>은 자극적인 소재를 자극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사건에 휩싸인 모자를 다루지만 이 영화에서 정확하게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모자의 '회복'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 이 영화를 명작으로 남아있게끔 한다. 둘밖에 모르던 모자가 천천히 더 넓은 세상을 수용할 수 있게 되는 힘을 기르게 되는 과정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또한 조이와 잭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입은 상처로 자신을 갉아먹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 같기도 하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서 천천히 괜찮아질 것이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따스한 위안을 보내준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걸음마가 느리다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는 아주 평범한 속도니 급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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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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