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현실적인 현실의 이야기 - 데클란 ② -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글 입력 2020.08.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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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클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외친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나한테 달려있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당신에게 달려있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작가의 대변으로 빨리 이 이야기의 완벽한 결말을 쓰고자 한다.

 

 
사람들이 주목해야할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극장이 어떻게 공감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지, 이 이야기가 얼마나 내 마음과 맞닿아 있는지

 

- 리비

 

 

아름다운 말이지만, 결코 현실에서 아름답게 그려질 수 없는 이야기다.

 

 


 

 

*

이 글은 연극 <마우스피스>의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한다.

 

 

마우스피스.jpg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소리내주고 싶었어요.

  

 

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사람이 지금 직접 내고 있잖아. 무대 위 내 이야기가 있어. 그 주인공은 행복하겠네? 시안이의 말은 틀렸어.

 

 

데클란은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 무대 위에서 만난다. 극 중 극 <마우스피스>의 주인공은 데클란의 가정환경, 이야기 모든 것이 똑같다. 그러다가 결국 끝내 목을 매달고 자살한다. 데클란의 마지막은 어떠한가.

 

데클란의 진짜 이야기는 끝난 것이 아니지만 대다수의 관객, 그 이야기의 당사자가 아닌 모두가 극이 끝나고 그저 그 작품이 잘 만들어졌다고, 무대 위 배우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다 간 청년을 잘 표현해냈다고 박수치고 끝이 난다. 그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끝나지 않았는데도 그냥 끝났다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현실의 이야기를 극작으로 잘 표현해낸 작가에게 노고의 박수를 보내며 칭찬하고 연극은 마무리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단순한 콘텐츠로 즐기는 우리 모두가 결국 데클란의 연극 이야기의 결말처럼 그를 목매달게 만드는 것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로 그에 속해있다. 소위 빈곤, 가난과 같은 개인이 처해있는 안타까운 상황을 전시하고 그를 대상화하는 빈곤 포르노는 연극, 영화 가릴 것 없이 예술계 콘텐츠로 계속된다.

 

나도 그에 눈 감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현실을 잘 표현한 그들에게 박수를 치고 그 이야기의 실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거대한 공감의 기계에서의 공감을 극장 밖으로 가져올 수도 없었고 가져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데클란

 


모든 것이 다 잘 될거야.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
 

 

세상에 닫혀있던 데클란의 입은 리비를 만나고 열리기 시작한다. 마우스를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리비는 그의 말을 녹음하고 그를 토대로 글을 쓴다. 그의 이야기로 극을 만드는 것이다. 데클란이 꺼낸 말도 결국 리비의 녹음파일 속으로 들어가고 리비가 그의 말을 모두 대신해버린다. 그냥 입을 막아버리기까지 한다. 그녀는 불안정성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불안정을 해결해주지 못한 채 연극 속 그를 목매달게 함으로써 그냥 끝내버린다.

 

나는 리비가 데클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 점점 친해져 갈 때, 리비가 겪었던 그 예술 속 과정으로 데클란을 끌어들이고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런던 제작자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친절하게 대해준 것처럼 똑같이 데클란의 그림을 얻기 위해, 데클란의 이야기를 얻기 위해, 글의 소재를 얻기 위해 그렇게 잘 대해주는 것처럼 다가왔다. 자신이 얼마나 그 과정 속에서 상처받았는지 알면서 똑같이 대하게 되는 모습에서 그들이 끝없는 추락을 할 것임을 너무나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어느 편에 서서 그의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철저히 무시되는 사람들의 입을 열어주고 싶은 걸까,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시민의식, 개념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그 프레임을 얻고 싶은 걸까. 아마도 후자인 것 같다.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를 어찌 가슴 깊이 공감하고 진정으로 그들을 생각하고 위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데클란보다 나는 리비의 편에 속했고 끝없는 추락을 하고 있는 그 상태의 데클란을 알고서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한 뒤 전화번호도 바꾸고 아예 차단해버리는 리비의 모습에서 도움을 주는 것에 망설이고 자체를 외면하고자 기피하는 내가 떠올랐다. 리비는 분명 데클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떠났다. 왜 그랬을까.

 

 

모두가 사라져버렸어요.

 

 

극 중 극 <마우스피스>, 영화 <기생충>처럼 예술이 가난을 표현하고 최대한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는 것이 과연 무슨 변화를 가져다준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어떤 타자를 대상화하고 그를 전시한다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다수의 예술 소재가 가난, 폭력, 억압, 부정적인 기억을 가진 인간군상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예술 속 그들의 "불쌍한" 모습은 대상화되어 어디까지나 관객들에겐 이야기 속 남의 모습일 뿐이다.

 

이러한 연극을 보며, 콘텐츠를 향유하며 관심을 갖는 것 자체에 허영심을 느끼고 내적 충족을 느낀다. 이에 나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 향유 활동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러한 현실을 실제로 마주 보고 변화를 일으킨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 연극은 우리가 외면하는 이 피상적인 문제를 정확히 명시하고 관객들이 스스로 이를 느끼게끔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극을 보고 난 뒤, 오랫동안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고, 나도 모르게 그를 즐긴 나 자신에 대하여 되돌아보게 된다.

 

자신을 대상화한 작품, 그 세상 끝에 처박혀 괴로워하다가 결국 목매달아 목숨을 끊어버린 비극적 소년의 이야기를 마주한 기분은 어땠을까. 서커스의 벌거숭이, 광대처럼 자신의 약점과 아픔을 극적으로 전시해놓은 것을 마주한 순간, 그리고 내 이야기를 꺼내게 하기 위해 노력했던 리비가 무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마주한 순간 무슨 감정이 솟구쳤을까. 이 연극이 끝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서 있는 출연 배우들, 그리고 감사하다고 웃으면서 안정적으로 말하는 리비를 보며, 마치 저 연극 속 이야기의 결말이 사람들이 원하는 결말이고 곧 정답인 걸까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죽어야만 하는 결말일까. 죽을 수 밖에 없을까. 그의 마음을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모두가 사라져버리고 있음을 아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리비,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그의 옆을 지켜준 단 한 사람 리비가 그렇게 자신을 떠나고 자신의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정작 그를 내버려 두고 모두가 사라지고 끝없는 추락을 하는데도 응답을 하지 않았던 그녀가 내린 데클란의 이야기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걸 직접 무대로 본 순간 어떻게 이를 받아들여야 했을까.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데클란, 03년생 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딱한 이야기에 박수를 쳐주고 동정을 보내는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사람들이 원하는 그 추락, 예상된 결말, 시나리오에 따라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까? 마치 정답처럼?

 


모든 관객이 숨죽여 그녀로부터 탄생한 이 무대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살아지는 구조를, 주목해야 할 모습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참 이율배반적이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리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데클란의 대답은 돈이었다. 시안과 함께 살면서 가라데를 배우게 하고 그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9천 파운드를 원한다. 이 대답 또한 완벽히 비극적으로 관객들이 원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며 저 딱한 청년의 대답을 언급하며 입에 오르내리고 신문의 작은 한 켠에 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더 불쌍하고 딱한 소재로 관심을 돌릴 것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니까. NGO 단체의 빈곤 전시 광고가 이미 이에 관심을 갖는 우리 현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관심을 가져야겠어'라는 단순한 생각이 스치고 이 연극에 대한 생각은 끝이다.

 

극장에서 나와 그 마지막 결말을 이야기하며 끝났다고 하지만 실제는 아직도 살아 숨 쉬고 힘들어한다. 그런 비극에 찬사를 보내겠지.

 

이 극은 리비가 극의 끝까지 마무리한다. 데클란같은 존재에게 마우스피스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그렇게 크게 절규하고 그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고 외치는데 사람들은 리비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녀의 말로 그의 삶은 단정된다.


데클란은 극장을 뛰쳐나가 에든러버 절벽으로 달려 나간다. 나만의 공간에서 거칠게 숨을 쉰다. 동시에 리비는 데클란의 숨을 조여오며 그의 마지막을 묘사한다. 데클란은 크게 숨을 쉬기 위해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둘은 같이 동시에 숨을 깊에 들이마시고 쉬지만, 리비는 데클란을 죽여간다.

 

이 연극 관객과의 대화에서 가장 크게 데클란에게 '모두가 잘 될 수는 없다'는 걸 강하게 심어준다. 그 어린아이가 모두가 바라는 정답이 죽음이라는 것을 느끼며 모두가 잘 될 거라면 나에게도 좀 잘 되게 해달라는 그의 절규는 누구에게 들릴까, 누구에게 남을까?

 

데클란이 계속해서 다음에 일어날 일은 나한테 달려있다고, 누구에게도 달려있지 않다고 해도 리비는 작가로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이것이 마지막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너네가 끝맺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진짜로 마지막 장면같은 건 없어 이야기는 이어지고 너저분하지만 그게 진짜니까.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암전.

 


 

[Opinion] 끝나지 않은 현실의 이야기 - 극장 ③  -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에서 계속.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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