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은 날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 69세 [영화]

글 입력 2020.08.2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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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69세 효정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9세의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적인 일을 당한다. 긴 고민 끝에 효정은 동거 중인 동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과 주변 사람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효정을 치매 환자로 매도하고, 법원 역시 나이 차이를 근거로 사건의 개연성이 부족하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한다. 효정은 피해자가 더 고통 받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향한 일갈을 준비하는데…

 

아직 살아있는 69세의 나를, 당신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한 '사람'의 이야기


 

영화의 첫 장면은 새까맣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화면에 효정과 물리치료사의 대화 소리만 들려온다. "다리가 예쁘세요. 수영하셔서 그런가. 뒤에서 보면 아가씨 같아요."

 

숨을 참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 시킨다. 물리치료실 안이 보이고 침대는 커튼에 가려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이내 타이머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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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물 위를 부유하는 효정의 몸은 죽은 듯 움직임이 없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려는 노력 없이 그저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 혹은 현실을 따라가는 것처럼. 무력감에 온몸이 꽁꽁 묶여버린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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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간호사를 경찰에 신고해야겠어요"

 

 

불안한 얼굴을 한 효정. 효정은 동거인이자 조력자인 동갑의 노인 시인 동인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 간호조무사를 고소하기로 마음먹는다. 고소장 접수 후 경찰서를 찾은 효정과 동인. 경찰들은 효정의 고소장을 읽다가 조소와 함께 간호조무사가 친절 담당이라는 말에 "친절이 과했네" 등의 무례한 말들을 던진다.

 

영화에서 경찰과 같은 이들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수영장 라커룸에서 효정의 뒷모습을 보며 '처녀' 같다고 말하는 여성들, 효정을 차로 칠 뻔한 후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었던 운전자, 사람을 묻는 효정을 보고 버럭 화를 냈던 병원 간호사, 동인을 함부로 대하던 편의점 알바생, 노인인데 옷을 잘 입는다고 말하던 경찰, 효정에게 "조심 좀 하시지"라고 말하던 수간호사.

 

조사 과정에서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다림질을 하다가 옷을 태워 먹거나 양말을 짝짝이로 신는 등의 행동을 보이는 효정은 치매 검사를 권유받는다. 솔직히 나 또한 효정이 치매일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효정이 20대 성범죄 피해자였더라도 조사 과정에서 치매 검사를 권유받았을까?

 

 

"내가 젊은 여자였다면 내 말을 믿어줬을까요?"

 

 

계속되는 노력에도 '젊은 남성이 나이 든 여성을 성폭행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 부족하다'라는 이유로 영장은 기각된다. 사회가 노인 여성을 무성적 존재로 보는 선입견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여성이면서 노인일 수 없는 것일까. 아니 여성도 노인도 아닌 개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일까.

 

 


노인, 여성, 성폭력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장년층의 80%가 노인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으며, 노인의 86%가 나이로 인해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우리는 노인 혐오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현실을 선명하게 비추기에 현대 사회에 꼭 필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동일 실태조사 결과에서 우리 사회에서 혐오 표현의 대상으로 여성이 54%로 가장 두드러졌고, 젠더 이슈에 이어 노인 또한 30%로 높은 수치를 나타냈다. 이 영화가 의미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까지 여성 인권을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여성 노인 대상 성범죄'를 다룬 영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하루 종일 관련 기사를 검색해보고 조사 자료를 찾아봤다. 여성 노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특이 케이스가 아니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노인 대상 성범죄는 무려 155%나 증가했다. 왜 우리는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전문가들은 성폭력 통계 자체도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는 이상 드러나기 어려운 범죄인데 실제 신고율 또한 10%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각지대에 놓인 노인 여성의 신고율은 더욱 낮다. 이들 중에서는 극중 효정처럼 신체가 약해서 저항하기 힘들고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홀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노인인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낀다.

 

신고 후 조사나 재판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피해자를 몰아세우거나 추궁하기 일쑤이며 심지어는 "네가 조심했어야지", "그러게 옷을 왜 그렇게 입었어" 등과 같이 피해자의 옷차림이나 행동을 근거로 원인을 돌리기까지 한다. 영화에서 경찰이 진행하려고 했던 가해자와 피해자 대질 조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효정은 대질 조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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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세


 

대질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효정이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 누구에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방식으로 일을 해결해나간다. 직접 간호조무사의 부모를 찾아가 간호조무사가 했던 행동을 알리고 돌아와 펜을 들고 글을 쓴다.

 

효정은 소리를 지르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무릎 관절 탓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수영을 계속해왔던 것처럼,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이 69세인 이유는 노인과 중년의 경계에 있는 나이가 69세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 노인과 중년을 각각 떠올리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영화를 본 후 군인 아저씨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사실 아저씨가 아니라 그저 내 또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나이로 판단하고 묶을 수 없다는 사실과 함께 내가 그러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문제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주체가 노인들이라는 것이다. 영화에서 노인인 효정의 유일한 조력자는 또 다른 노인 동인이다. 무력하고 모를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부수듯 동인과 효정을 통해 보여준 단단한 노인 연대가 인상 깊게 남는다. 이는 단순히 노인 연대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존재의 관심과 지지, 연대의 필요성을 부각시켜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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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으로


 

영화가 끝난 직후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직하게 결말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몰입도 높은 전개에 비해 결말이 다소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는 곧 여운으로 바뀌었다. 이틀 가까이 영화를 함께 본 이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종이에 많은 것을 적었다. 영화는 더 많이 생각하게 했으며 더 많이 이야기하도록 했다.

 

노인 배우가 누군가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닌 오직 개인의 삶을 연기하는 영화라는 점 또한 좋았다. 실제로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예수정 배우를 통해 영화의 주제와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60대가 그린 60대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 깊게 다가왔다.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속에서 아직 다 적지 못한 말들이 참 요란스럽다. 여성, 노인 그리고 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성범죄. 누군가는 반드시 했어야 할 이야기를 꺼내주었기에 감사한 영화이며, 그렇기에 더 많은 이들이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영화이다.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

  

 

우리는 공평하게 나이를 먹고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효정이 화분 아래 놓인 낡은 동인의 시집을 발견한 것처럼, 그 시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노인의 모습을 한 소중한 개개인의 삶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과 함께 봄볕으로 나아가길 그리고 세상의 모든 효정이 꼭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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