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속삭임의 파동 [영화]

글 입력 2020.07.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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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성들에게 참으로 힘든 일주일이었다.

 

수많은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학대하는 영상을 국제적으로 유통한 아동 성범죄자 손정우를 이제 더는 처벌할 수 없게 되었고, 현직 남교사는 교내 화장실에 불법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적발되었으며, n번방 가해자를 쫓던 디지털 장의사가 미성년자 성 착취 영상 소지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피해자에게 리벤지 포르노 유포 협박 및 폭행을 가했던 최종범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신체를 촬영했다는 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서울시장은 비서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피소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여성들을 슬프게, 그리고 분노하게 하고, 끝내는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무너지지 않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슬픈 현실, 사법 체계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감각은 순식간에 우리를 잠식한다. 시위도 청원도 소용이 없었는데 우리가 이제 뭘 더 할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우리의 행동과 실천이 사실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을 종용하는 폭력에 맞서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영화 <밤쉘>은 개인의 용기, 그리고 수많은 개인의 연대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영원히 바꾸어 놓는가에 대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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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쉘>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언론인 폭스 뉴스에서 일어났던 성추행 폭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뉴스 프로그램 ‘폭스&프렌즈’의 진행자로 일하다가 CEO 로저 에일스의 성적 요구를 거부한 뒤 인기 없는 오후 시간대의 프로그램으로 좌천된 앵커 그레천 칼슨은 회사에서 해고된 뒤, 로저 에일스를 직장 내 성폭력으로 고소한다.

 

그의 폭로는 폭스 뉴스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로저 에일스, 그리고 그가 몸담은 폭스 뉴스는 칼슨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소송을 진행한 2016년 당시만 해도 미투 운동과 타임즈 업 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칼슨이 소송에서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그러나 그의 폭로 이후 폭스 뉴스의 간판 앵커인 메긴 켈리를 비롯한 많은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밝혔고, 에일스가 폭스 뉴스를 설립하기 이전에 그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증언들이 터져 나오며 로저 에일스는 회장직에서 사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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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자신과 가까운 곳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음이 밝혀졌을 때 여성들이 취하는 태도와 반응에 차이가 난다는 데에 있다. 사내 여성 직원 중에는 칼슨처럼 해고당하고 싶지 않아서 피해 사실이 있음에도 침묵하는 이들, 에일스가 방송국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것 때문에 적극적으로 에일스를 옹호하는 이들이 있다.

 

칼슨이 당한 일들을 자신은 겪은 적이 없다며 그의 폭로를 거짓, 혹은 보수 집단에 흠집을 내려는 정치적 공격으로 치부하고 칼슨을 비난하는 이들 역시 존재한다. 또 다른 앵커 메긴 켈리가 자신 역시 성추행 피해자라는 것을 드러내려 할 때, 그의 팀에 소속된 한 직원은 진실을 밝히라며 그를 지지하고, 다른 직원은 켈리가 폭로를 감행함으로써 자신이 일자리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사내의 권력 관계와 팽팽한 압박 아래서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각기 다른 선택을 내린다. 켈리와 칼슨이 커리어와 자신의 삶, 진실 사이에서 입을 열기로 택했을 때, 제스 카는 동료 케일라 포스피실을 돕다가 자신이 해고될까 봐 그와 선을 긋기로 한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이해관계를 가진 여성들이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 숨기도 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피해 사실을 왜 더 일찍 고발하지 않았는지, 또는 왜 적극적으로 다른 피해자들을 돕지 않았는지 묻는 모습을 마주한다.

 

그 상황에 직접 처해보지 않은 우리에게는 다른 여성들의 선택을 비난할 권리가 없고, 여성들이 모두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임에도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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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밤쉘>이 보여주는 여성들의 관계는 매우 다층적이다. 이는 세 중심인물 간의 이야기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밤쉘>에는 켈리, 칼슨, 포스피실이라는 세 인물이 모여 대단한 폭로를 준비한다거나 수많은 피해자들이 몰려나와 시위를 여는 장면이 없다.

 

<밤쉘> 속 성폭력 피해자들의 연대가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칼슨이 목소리를 내고, 켈리가 여기에 동참하고, 이에 회사의 압박을 받던 다른 피해자들이 하나둘 자신의 경험을 밝히는 일들은 단숨에 폭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느슨한 연대의 고리를 따라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켈리는 에일스의 다른 피해자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피해자들의 경험은 낮은 목소리로 퍼져 나간다. 누군가는 미적지근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밤쉘>이 그리는 여성연대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켈리가 피해자와 단둘이 앉아 남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가해자를 지목하는 피해자들의 속삭임. 에일스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은 이 속삭임들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결국 에일스를 무너뜨렸다.

 

칼슨은 결국 에일스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기고 비밀 유지 협약에 서명한다는 조건 아래 폭스 사의 공식적인 사과와 금전적 보상을 얻어낸다. 비밀 유지 협약이 피해에 대해 앞으로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는 의미이니 입마개를 채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변호사가 언급하지만, 칼슨은 미소 짓는다.

 

로저 에일스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보며 여성들의 삶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변화를 경험했다. 에일스가 성희롱으로 고발당하던 당시에도 성적 피해를 받고 있던 포스파일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스 사의 사원증을 버리고 회사를 나간다.

 

승리를 이끌어낸 여성들의 목소리는 소송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 파동은 그대로 남아 우리의 삶을 움직인다. 여전히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현실이 숨 막히지만, 황소윤이 노래하듯 변화는 불가피하다.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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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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