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주전사 쉬라, 변신소녀물의 과거와 현재 [TV/드라마]

글 입력 2020.07.0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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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변신 소녀물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이때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니까, 90년대에 자라난 어린이로서, 변신 소녀물이 방영되는 시간이 되면, 지상파밖에 나오지 않는 우리 집 거실에서, 만화 전용 케이블 채널이 나오는 친구네 집 거실로 자리를 옮겨 '본방사수'를 하긴 했다. 또 친구들과 종종 세일러문, 혹은 웨딩 피치 놀이를 하긴 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속에도 변신 소녀를 향한 열망과 애정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잠재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린이를 벗어나 청소년, 성년이 될 때까지 변신 소녀물에 크나큰 호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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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은 금세 희미해졌다. 내 또래의 친구들이 종종 과거에 보았던 변신 소녀물의 '썰'을 풀며 급격하게 친해질 때도,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멀뚱 그들의 말을 듣고 있기 부지기수였고, 얼마 전 각종 액세서리 회사에서 변신소녀 애니메이션을 모티브로 한 액세서리 라인들을 출시할 때도 큰 열망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내가 변신 소녀물에 대한 과거의 열망과 애정을 더 드러내지 않은 채 마음 깊숙한 곳에 숨기고만 있었던 데에는 성장 과정을 따라 얻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유치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실감하게 되었다. 불과 한 학기 전만 해도 변신 소녀 물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갑자기 그런 것들은 유치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유치하다고 하니 왠지 정말 유치해 보였다. 그리고 이때 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마술봉을 휘두르는 변신 소녀들보다 둔탁한 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는 해리포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CG로 만들어진 드래곤, 디멘터, 호그와트 등에 비하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말하는 고양이 정도는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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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곧 두 번째 이유와도 이어진다. 변신 소녀 물을 좋아하지 않았던 두 번째 이유, 변신 소녀 물이 아니어도 애정을 품을 콘텐츠들이 많았다. 중학교에 입학해 초등학생 때보다 자유롭게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던 나는, 미드, 영드 커뮤니티를 발견하면서 그곳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클릭만 하면 쏟아지는 방대한 영상들과 스토리들 사이에서 변신소녀물이 자리를 잡을 곳은 없었다. 성인이 되어 넷플릭스, 왓챠 등 스트리밍 서비스가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도입되고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이와 같은 경향은 더욱 뚜렷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변신 소녀물은 가히 한 세대를 풍미했던 장르였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더라도 심심찮게 변신 소녀 물을 추억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90년대생들이 주요 문화 소비 주체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변신 소녀물에 대한 그리움은 커지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 추억에 마음 놓고 참여할 수 없었다. 변신 소녀 물이 과연 나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없었다. 학문뿐으로 만이 아니라 각종 콘텐츠에서,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접하던 시기였다. 변신 소녀물에서는 짠 것처럼 쌍둥이처럼 다 마르고 늘씬한 인물들이 주로 나오고, 그중 하나에서는 '결혼'을 신성화하듯 마법을 부리면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러던 중, 드림웍스에서 넷플릭스에 변신소녀물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상이 풀리고, SNS에 호평이 올라왔지만 나는 큰 기대가 없었다. 위에 적었던 몇 가지의 이유로 한참 동안 그 작품을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먹으러 자리에 앉았는데 나는 밥을 먹으며 볼 영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밥 먹을 때 영상물을 보는 건 현대인의 필수 덕목 이므로 짧은 시간에 얼른 적당한 영상물을 찾아야 했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때 소문으로만 들었던 '쉬라'가 내 넷플릭스 화면 메인에 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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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쉬라는 조금 유치했다. 평생을 마법의 존재 '공주'들과 싸우며 살아오던 호르드 군 소속 아도라가 우연한 일치로 자신이 '공주'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이 소속되어 왔던 호르드 군이 민간인을 해치는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호르드 군으로 대표되는 악과 싸우는 이야기다. 악과 싸우는 '공주'라는 존재도, 함께 나오는 유니콘도 어릴 때 봤던 변신 소녀물의 공식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용의 큰 흐름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이 유치한 작품에서 쉽게 헤어나올 수 없었다. 다음 화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며 연신 '다음 화 보기'를 눌렀다. 원래 아는 맛이 더 맛있다고들 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처럼. 어릴 땐 그렇게 지겹던 변신소녀물이 이제는 또 색다르게 다가왔다.

 

물론, 쉬라는 옛날과 똑같은 변신소녀물이 아니었다. 변신하는 소녀들이 나와 악당을 물리치는 건 같았지만, 나오는 변신 소녀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현실의 소녀들이 그러하듯이, 다양한 체형, 피부색,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인 넷토사와 스피너렐라는 결혼한 사이며, 주요인물인 보우의 보호자들도 게이 커플로 나오는 등 다양한 성 정체성을 포용한 것 역시 과거의 변신소녀물과는 달랐다.

 

마법봉 대신 칼을 들고 마법의 주문을 외치면 마법의 존재로 변신한다는 점 역시 달랐다. 하지만 어쨌든 쉬라도 '변신 소녀'였다. 내가 '쉬라'를 즐겁게 봤던 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변신소녀에 대한 열망과 애정이 꽃을 피운 탓도 있을 터였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한때는 그렇게 꺼렸던 '변신 소녀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쉬라'가 나올 수 있었던 거라고.

 

물론 이전의 여성 전사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헬멧과 쫄쫄이를 입고 나와 괴수들을 물리쳤던 작품에서도 여성 전사는 있었고, 사랑스러운 포켓몬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는 작품에서도 여성인물은 등장했다. 하지만 주인공이 소녀인 작품은 많지 않았다.변신 소녀물 놀이를 할 때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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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유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고 우리 또래의 많은 사람이 변신 소녀물에 대한 애정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은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애정 덕분에 지금의 성 인지 감수성으로도 불편하지 않은 작품 '쉬라'가 나올 수 있었다면, 앞으로는 또 더욱 발전할 '변신소녀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 날이 기대된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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