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유를 위하여 - 칼릴 지브란, 예언자 6 [문학]

14장, 자유에 대하여 / 24장, 쾌락에 대하여
글 입력 2020.06.22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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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에는 한 웅변가가 말하기를 저희에게 자유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리하여 그는 대답했다.

 

성문 곁에서, 또 그대들의 집 난롯가에서 나는 그대들이 엎드려 저만의 자유를 비는 것을 보았다. 마치 압제자 앞에 스스로 머리 조아려 설사 자기를 죽일지라도 찬양해 마지않는 노예들처럼.

 

그렇다, 사원의 숲에서, 성채 그늘 아래서 나는 그대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와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 마음은 속에서 피를 흘린다.

 

왜냐하면 그대들 자유에 대한 욕망이 그대들에게 재갈을 물릴 때만이, 또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기쁨이라고 떠들기를 그칠 때만이 그대들 실로 자유로울 것이므로.

 

그대들은 실로 자유로우리라.

욕망도 슬픔도 없는 밤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 찬 낮에, 그대들의 삶을 묶는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해방되어 이들 위로 일어설 때만이.

 

그리하여 그대들 깨달음의 새벽에 지난 한낮의 시간을 묶었던 사슬을 깨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들 낮과 밤 저편으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실로 그대들 자유라 부르는 것은 이 사슬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슬. 비록 그 고리는 햇빛에 반짝거려 눈을 어지럽게 할지라도.

 

그리하여 그대들 자유로워지고자 내버리려 하는 것, 그것은 자아의 파편 외에 무엇인가. 그대들 내버리려는 법이 부정한 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대들의 이마에 그대들의 손으로 쓴 것. 그대들 아무리 법전을 불사른다 해도, 심판관의 이마를 씻고 바닷물을 퍼붓는다 해도 그것을 지울 수는 없으리라.

 

그리하여 그대들 만일 쫓아내고자 하는 자가 폭군이라 한다면, 우선 보라, 그대들 내부에 서 있는 그의 옥좌가 무너져 있는가를.

 

왜냐하면 자유 속에 일 푼의 포악함도 깃들어 있지 않고 긍지 속에 일 푼의 부끄러움도 들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폭군이라 해도 자유인과 긍지인을 다스릴 수 없으므로. 그리하여 그대들 벗어 던지려 하는 것이 근심이라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강요된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대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없애려 하는 것이 공포라면, 공포의 자리란 두려운 자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 가슴속에 있는 것.

 

모든 것은 실로 그대들 존재 내부에서 반쯤 뒤엉킨 채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 열망하는 것과 두려운 것, 불쾌한 것과 그리운 것, 추구하는 것과 달아나고 싶은 것들이. 이들은 그대들 안에서 마치 한 쌍의 빛과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채 움직인다. 그리하여 한 그림자가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면, 남은 빛은 서성거리며 또 다른 빛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다.이렇듯 그대들의 자유도 자기의 족쇄를 잃어버릴 때 비로소 더 큰 자유의 족쇄가 되는 것임을.

 

- 예언자 14장, 자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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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그래, 나는 자유를 원한다.

 

자유를 부르지 않는 이를 나는 본적이 없다. 더러 인간에게는 달콤한 복종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어보기도 하였으나, 그에게 완전한 부자유마저 달콤할 리는 없었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순간은 자유를 향한 꿈속인지도 모르겠다. 완전한 자유를 향해, 그 닿을 수 없을 곳으로 우리는 인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언자가 가리킨, 자유를 엎드려 비는 이는 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 바라는 자유가, 반드시 모든 것에 대한 나의 전능함도 모든 사슬에 대한 나의 해방 됨도 아니었으니, 나는 무엇을 빌고 있었던가. 그런 질문을 가지어 본다. 4층 카페에 앉아, 테라스에 앉어 나는 이런 쓸 데가 없는 고민을 시작했다. 언제나 모르는 중에도 자유를 빌고 있을, 나의 그때 모습은 자유로웠나.

 

내가 비는 자유는 언제나 나로부터의 자유.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기를 오래도록 갈망했다. 나와 우리는 너희에게도 억압받곤 하지만, 스스로에게도 억압받는 동물. 그리고 영원히 활개를 치는 꿈의 날개를 안고 난 슬픈 족속들이다.

 

소처럼 서글프고 싶어라. 차라리 고요히 슬픔 속을 머물고 싶었다. 부르짖는 나의 목소리에 어린, 그 붉은 냄새가 너무 처절하다. 그래서 가끔은 처량하기도 하여라. 운명에 순순히 순종하는 내 스스로의 모습을 그려본 지가 오래다. 소처럼 해맑은 눈망울을 한 나의 초상화.

 

 

또 자유가 최후의 목적이며 기쁨이라고 떠들기를 그칠 때만이 

그대들 실로 자유로울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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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떠올리며, 근심하며, 고통하고 부르짖는 때가 가장 자유롭지 않은 때라고 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부자유를 느끼는 감관마저 눈 감고, 가장 조용히 앉아 있을 때에 차라리 자유롭다는 낱말에 가장 걸맞을 것이다. 그것은 백치의 모습일까, 현인의 모습일까. 그러나 영원히 활개를 돋우며 터오는 동에 맞추어 잠을 깨는 꿈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는 영원히 꿈꾸는 존재라 서글픈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백치건 현인이건 내게서 아득히 멀다.

 

어디까지의 자유가 우리에게 허락된 지를 우리 모른다. 자유가 허락의 주체를 잃어버린 까닭이다. 이것이 네게 마땅한 자유의 전부이니라고 능히 말씀하실, 인간 중의 인간이 우리의 세대에 종말한 까닭이다.

 

어디까지의 자유가 내게 허락된 지를 나 모른다. 그러니, 어느 만큼 가지고서야 나는 내 가질 충분한 자유를 소유하였는지 알 수 없다. 사원의 숲, 성채 그늘 아래, 카페의 한가로운 에어컨 밑에서도 나는 자유를 꿈꾸고 있었다. 그 자유는 이제, 욕망의 다른 얼굴이라는 욕된 이름을 떠올린다.


 

사원의 숲에서, 성채 그늘 아래서 

나는 그대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자가 

자유를 마치 멍에와 수갑처럼 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 내 마음은 속에서 피를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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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자유에 두 가지 이름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자유는 욕망에 대함과 억압에 대함으로 각각 나뉘더라. 억압에 대함은 다시 너희의 억압과 스스로의 억압으로 나뉘다. 자유는 하나의 이름으로 서 있지만, 그 안에 너무 많은 얼굴들이 뒤섞이어 있었다.

 

모든 욕망에 대한 자유, 그것은 스스로의 전능함을 꿈꾼다. 어떤 욕망의 좌절도 원치 않는, 무한한 꿈을 지닌 우리는 그것을 환상향처럼 소망하다. 어디까지 가지면 나 만족할지를, 미리 꿈으로 알아볼 수가 없겠기에. 만족의 역치는 언제나 뒤에, 한참 뒤에나 깨달음으로 오곤 하더라. 그때 늦은 깨달음엔, 회한이 섞이어 있었다. 한숨, 그것은 내 아버지의 음성.

 

모든 억압에 대한 자유, 그것은 울타리에서 해방된 들판을 꿈꾼다. 어떤 짓눌림과 경계가 자아내는 아쉬움도 원치 않는, 무한히 뻗어나 있는 언덕 위를 걷고자 하는 우리는 그것을 모조리 걸어낼 수 있을 것처럼 소망하다. 어디까지 걸으면 나 충분할지를, 또한 미리 꿈으론 알아볼 수가 없겠기에. 모든 구속을 벗어던지고 한참을 걸어낸 뒤에야, 인간에겐 ‘어떤’ 구속이 필요함을 느끼어 아시더라. 탄식, 그것은 내 고모님의 음성.

 

 

그대들은 실로 자유로우리라.

욕망도 슬픔도 없는 밤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 찬 낮에, 

그대들의 삶을 묶는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해방되어 이들 위로 일어설 때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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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꿈도 꿈의 색채로 유지될 수가 없었다. 현상계의 캔버스 위로 드디어 던져진 꿈의 스케치는 언제나 허물어져 가다. 꿈은 늘 현실로 와선 깨어지는 것, 그것이 ‘자유’로이 채색된 그림이었기에. 자유의 소망은 그러므로 또한 늘 꿈이다. 간절할수록 더 더 완결한 꿈으로 다가가는 것.

 

나는 자유를 꿈꾸기보다는, 자유로이 사유하고 싶었다. 어떤 갈증도 침노할 수 없는, 완전한 사유계를. 그것에서는 구름에 가리워도 늘 푸를, 하늘의 맛이 난다. 자유에 대한 꿈조차도 사실 갈증이었으니, 어떤 갈증과 꿈도 흔들 수 없도록 무감하고 싶었다. 불가에서는 근심의 고향이 행복이라 하였지. 나는 행복을 버려내고 부러 멀리 두는 것만이 번뇌로부터 벗어나, 고요함을 이룰 유일한 방법으로 알았다. 그러나 저 이는 근심으로 가득 찬 낮에 자유로우리라 말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일 년에 한 번씩 그 도시를 방문하는 은자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저희에게 쾌락에 대해 말씀해 주소서.

 

하여 그는 대답했다.

 

쾌락이란 자유의 노래,

허나 그것이 바로 자유는 아니다.

쾌락이란 그대들 욕망의 개화,

허나 그것이 열매는 아니다.

쾌락은 정상을 향하여 소리치는 심연,

허나 그것이 심연은 아니며 정상도 아니다.

그것은 날개 달린 새가 우리에 갇혀 있는 것,

허나 사방은 둘러싸여 있지 않다.

그렇다, 실로 쾌락이란 자유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내 기꺼이 그대들로 하여금 가슴 가득히 그것을 노래하게 하리라. 하지만 노래하느라 그대들의 기운을 잃게 하지는 않으리.

 

그대들 젊은이 중 어떤 이는 마치 쾌락만이 전부인 것처럼 얻으려 애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판받고 비난을 받는다. 허나 나는 결코 그들을 심판하지도 견책하지도 않으리라. 나는 그들에게 쾌락을 구하게 하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쾌락을 찾게 될 땐, 결코 쾌락 그것만을 찾게 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쾌락의 자매는 일곱, 그중 가장 어린 형제도 쾌락보다는 아름답다는 것을. 그대들은 듣지 못했는가, 뿌리를 캐다 땅속에서 보물을 찾은 이의 얘기를?

 

또한 그대들 노인들 중의 어떤 이는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처럼 후회로 쾌락을 추억한다. 하지만 후회란 마음의 벌이 아니라 다만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 여름날의 수확과도 같이 그들은 감사로 쾌락을 추억해야 하리라. 허나 만일 후회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위로받게 하라.

 

또한 그대들 중엔 쾌락을 찾을 만큼 젊지는 않으나 또 회상할 만큼 늙지는 않은 이들도 있다. 그들은 탐구하는 것이, 회상하게 될 것이 두려워 일체의 쾌락을 피하고자 한다. 혹 영혼을 돌보지 않게 되거나 죄를 짓지 않도록. 하지만 이 도피 속에도 쾌락은 있는 것. 그리하여 비록 떨리는 손으로 뿌리를 캘지라도 역시 보물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니 내게 말해다오. 영혼을 어기려 하는 자 누구인가를. 나이팅게일이 밤의 정적을 거역하는가? 혹은 개똥벌레가 감히 별을? 또 그대들의 불꽃, 혹은 그대들의 연기가 바람을 괴롭힐 것인가? 생각해 보라. 그대들의 영혼이 막대기 따위로 휘저을 수 있는 고요한 연못인가?

 

때로 그대들은 스스로 쾌락을 거부하면서도 그대들 존재 내부의 깊은 곳에 욕망을 감춰 둔다. 누가 아는가. 오늘은 없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실은 내일을 기다리고 있음을. 그대들의 육체조차 제 물려받은 바와 당연한 요구를 알고 있으니, 결코 속지는 않으리라.

하므로 그대들의 육체는 영혼의 하프. 그로부터 달콤한 음악을 울리게 하는 것, 또한 혼란한 음악을 울리게 하는 것은 그대들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가슴속으로 이렇게 묻는구나. `어떻게 저희가 쾌락 속에서 어느 것이 선이며, 어느 것이 선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대들의 숲, 그대들의 정원으로 가 보라. 그러면 거기서 그대들은 꽃으로부터 꿀을 모으는 벌의 쾌락을 알게 될 것이다. 허나 벌에게 꿀을 바치는 것, 그것 또한 꽃의 쾌락임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벌에게 꽃은 생명의 샘, 또한 꽃에게 벌은 사랑의 사자이므로. 하여 벌과 꽃, 그들에겐 쾌락의 베풂과 받음이 필요이며 또 황홀한 기쁨인 것을.

 

오르팰레즈의 사람들이여, 부디 꽃과 벌처럼 즐겁기를.

 

예언자, 24장 - 쾌락에 대하여

 

  

쾌락이란 자유의 노래,

허나 그것이 바로 자유는 아니다.

쾌락이란 그대들 욕망의 개화,

허나 그것이 열매는 아니다.

 

그것은 날개 달린 새가 우리에 갇혀 있는 것,

허나 사방은 둘러싸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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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감각은 자유로운 자아가 부르는 노래의 감각. 그 쾌락은 모든 즐거움의 이름 됨이요, 그 자유는 모든 종류에 대한 우리의 꿈이다. 그러나 자유를 얻은 자아가 노래를 부른다 하여, 그것이 자유의 쟁취를 뜻하지는 않았으니, 그 자유에 우리 머물러 있지를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는 필경 욕망과 함께 간다. 어떠한 욕망, 심지어는 마땅한 것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조차도 욕망과 함께 간다. 그 욕망이 꽃으로 피어올라 만발할 때에, 피우는 것은 쾌락.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열매의 표지로써 거기 매달려 있지는 않는다고 하신다. 열매는 완성된 것, 나무의 사철 꿈이 도착한 분명한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쾌락은 분명 도착한 곳에를 끝없이 일렁이는 바닷바람이 아닌, 잠깐 머물곤 마는 들바람이었다.

 

 

때로 그대들은 스스로 쾌락을 거부하면서도 그대들 존재 내부의 깊은 곳에 욕망을 감춰 둔다. 누가 아는가. 오늘은 없는 듯 보이지만 그것이 실은 내일을 기다리고 있음을. 그대들의 육체조차 제 물려받은 바와 당연한 요구를 알고 있으니, 결코 속지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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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이 자유의 일차적인 목적이라 하여도, 그것은 사흘 밤을 가지 않는 바람의 속성을 닮았다. 그리고 바람이 그친 곳에서는 그 부재를 여실히 알게끔 되는 법. 쾌락을 위한 여정이 길었고, 쾌락의 갈증이 질긴 이에게는 어느새, 그 쾌락을 체념하는 마음이 어릴지도 모를 일이다. 외면, 그것은 나의 마음이다.

 

나는 그것이 진실된 자유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인 줄로 알았다. 그것은 나의 것이 못 되는 것, 그러나 그런 고행을 감내하려는 이의 순례길 뒤를 따르는, 절밥을 꿈꾸며 동냥하는 이의 마음가짐 정도를 나 가졌던 기억이 난다. 일체 쾌락을 버리지 못할 나는, 어떤 쾌락만을, 내가 갖지 못할 어떤 쾌락만을 버리려 애씀으로 조금 나마 더 자유에 가까웁기를. 왜냐하면 고통하는 내 추한 몰골은 전부, 쾌락의 꿈이 좌절된 모습을 띠고 있었기에.

 

허나 나라고 몰랐을까. 그 기도가 되지 않을 거짓 기도임을. 쾌락은, 그러니까 욕망의 꽃, 해방된 욕망의 노래는 좌절되는 것만으론 영 지워낼 수가 없는 것. 그것은 꽃 위의 꽃, 노래 위의 노래, 해방 너머의 해방을 영원히 꿈꾸는 위험한 무한이기도 하거니와, 꽃 밑의 꽃술, 노래 이전의 마음, 해방에 대한 끈질긴 간절함으로써, 언제까지고 잊히지 않을듯한 영겁처럼 보이기도 하다.

 

욕망을 밀어 넣는 것은 사실 유보시키는 일. 언젠가 이 비밀한 소원을 쟁취하는 때까지 내게 마저 숨기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숙원으로 잠재워둔 욕망은, 뒤늦은 보상에 각성하며 폭군이 되고 마는 것. 그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까닭인즉 미뤄둔 욕망이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는 때문이다.

 

하나의 육체가 생존을 말미암아 온갖 욕망의 향수를 뿌리는 일이란, 그 육체가 온갖 욕망의 세습으로 이루어낸 결정인 때문이라면. 우리는 앎 이전에 피로써 제 몫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모든 사라진 존재의 흔적마저 담고 있는, 긴 역사의 강. 욕망은 사실, 미루고 잊어내는 것으로도 잊히지 않는 우리의 뿌리, 우리를 이루고 있는 본질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끝끝내 부정하여 외면하려는 이에게, 장차 까닭이 지워진 채로 영겁의 번뇌가 일고, 그것을 목도하는 정신력이 한계에 이르러선 마침내 병마저 얻고 마는 것을 거듭 보고 있자면 참으로 그렇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가슴속으로 이렇게 묻는구나. `어떻게 저희가 쾌락 속에서 어느 것이 선이며, 어느 것이 선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까?` 

그대들의 숲, 그대들의 정원으로 가 보라. 그러면 거기서 그대들은 꽃으로부터 꿀을 모으는 벌의 쾌락을 알게 될 것이다. 허나 벌에게 꿀을 바치는 것, 그것 또한 꽃의 쾌락임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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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미루는 우리의 사정은, 내 지금 그를 갈망하되 티끌만큼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 하나이고, 내 지금 그를 갈망하되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운 때문이 둘일 것이다. 그래 쾌락의 품 안에서 선과 악을 어찌 구분할까. 쾌락은 부정한 것이라며, 짐짓 거절하려고 젠체하는 우리네 모습이 오랜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선대부터 내려오는, 전통 같은 거짓 체념.

 

그것이 간절함으로 우리 인식의 눈마저 가릴 만큼으로, 본질적이고도 강렬한 명령이었음에. 우리가 어떻게 그 품 안에서 옳고 그름을, 마치 멀리 떨어져 바라볼 수 있다는 듯이 읊어볼 수나 있을까. 차라리 두렵고 부끄러워, 거짓같이 밀어낼 일이렷다.

 

나의 숲으로 들어가면, 그곳엔 꽃과 벌의 쾌락, 즉 한 몸을 이루는 쾌락이 있을 것이요, 그것은 순환하는 쾌락이라 하시니, 저희가 그것을 어떻게 알리요 나는 되묻고 싶어지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쾌락과 동시에 성립하는, 주는 이의 쾌락. 주고받음이 동시에 성립되며 동시에 쾌락일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음을 머리로 안다.

 

그러나 우리가 받는 이인 동시에 주는 이가 되기 위하여, 나의 숲과 사원으로 돌아들어 와 진실된 사랑을 하는 것만으로 가당키나 할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받는 동시에 받기를 멈추고, 주는 동시에도 또한 주기를 멈추어야 하겠더라. 그 둘의 평형을 위해, 나는 무던히도 전전긍긍하며 애를 써야 하겠더라는 말이다. 저울의 수평 위에 고요히 멈춰있는 것은 가당키나 할는지. 적어도 우리가 근심으로 가득 찬 낮에를 계속 살아가야만 한다면은 말이다.

 

 

그대들은 실로 자유로우리라. 

욕망도 슬픔도 없는 밤이 아니라 근심으로 가득 찬 낮에, 

그대들의 삶을 묶는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해방되어 이들 위로 일어설 때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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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벗어던짐으로써, 쾌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쾌락을 꿈꾸는 동시에 근심하면서도, 모든 자유를 막는 삿된 생각들마저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는 이가 그 누구일지를 잘 떠올릴 수가 없다.

 

나는 자유로울지도 모른다. 내가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 그 단 하나를 완전히 태워버릴 수 있다면. 실로 사원의 숲, 성채 그늘 아래, 카페의 한가로운 에어컨 밑에서 나는 자유롭다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찰나에 대함, 영원한 자유와 공고한 자유가 어디 있는지를 다시 궁금해하는 나를 본다. 오히려 이것, 자유에 대한 질문과 탐구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이었을까.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이었을까. 수평을 맞추고자 매일이 새로운 수고로움을 져야 할 나는, 그것을 마땅히 여기어 수고하는 나를 행복해야 하는 것일까. 혹 그 수고로움을 잊고, 그것을 우리의 마땅한 숙업으로 삼아 마치 우리의 당연한 매일과 같이 잊어내어서는, 그 속을 우직하게 걸어가야 하는 일이었을까.

 

자유와 쾌락.

누구는 쾌락을 버리라 하시고, 누구는 쾌락을 기어이 버려내고자는 헛수고를 버리라 하신다. 누구는 자유를 추구하라 하시고, 누구는 자유를 추구하려는 부질없는 마음을 버리라 하신다.

 

자유와 쾌락.

자유는 그래, 쾌락의 달성이요, 그것이 일시적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신다. 그러나 누군가는 자유란 일체에서 벗어난 것이라 하시고, 또 누군가는 자유란 자유에 대한 갈망 자체를 내려놓고 지금에 머문 것이라 하신다.


자유는 어떤 모습의 쾌락이건, 그것을 충족되었을 때의 마음가짐이라 한다면. 쾌락의 얼굴에 따라 자유의 짓는 표정이 달라질 것이 당연하다. 그 쾌락 중에는 한없이 받음으로써 충족되는 것이 있고 또 한없이 줌으로써 충족되는 것이 있을 것이며, 잘 모르지만 주고받음으로써 순환의 고리를 이루는, ‘원형’의 것이 있다 하신다. 그것이 무엇일지.

 

벌이 벌의 숙명을 다함으로써, 또한 꽃은 꽃의 숙명을 다함으로써 원환하는 고리의 쾌락을 자아낼 수 있다는 말. 그렇다면 나는 나의 숙명을 깨닫고, 또 그 숙명이 닿아 마땅할 누군가와 그 누군가의 숙명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어찌 내 사유의 숲에서 홀로써 알아낼 수 있을까. 오직 부딪혀 보아야 하고, 일단 살아보아야 알 것이다. 부디 그 앎이, 너무 늦게 날 찾지는 않기를.

 

그때까지는 나는 주고받음을 번갈아 멈추며, 쾌락과 좌절을 번갈아 달래고 조율하고 수평을 꾀하고 애쓰며 살아야 할 것. 고요함은 거기 없을 것이다. 한동안은 없을 것이다. 내 바라는 고요함과 멈춰있음, 혹은 처연하고 순순한 소의 눈망울은 아직 내게 너무 먼 것일게다. 나는 차라리 수분(受粉)하는 벌의 날갯짓을 닮고, 꿀을 담는 꽃의 마음가짐을 애쓰는 것이, 마땅한 방향이라 할 것이다.

 

즉, 아직은 홀로 거기 오래 남아, 고뇌로 분투할 때라 말해야 할 것이다.

부디 훗날, 나도 꽃과 벌처럼 즐거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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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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