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리', 시각예술의 틈을 파고들다 [다원예술]

작품의 보조적 수단이 아닌 주인공이 된 소리들
글 입력 2020.06.0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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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 혼종


 

1960년대 이후로 새로이 등장한 미술 장르들에서는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던 여러 가지 특징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매체적 다양성이다. 직전 시대까지 모더니즘 비평은 미술의 회화성을 침범하는 연극성, 문학성을 극도로 견제했지만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미술적 시도에서 이루어지는 다학제적, 다매체적 접근은 이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시작해 동시대미술까지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점점 짙어지고 있다. 동시대 미술은 어느 한 가지 장르로 정의될 수 없으며 오늘날의 미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단어는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 혼종이다. 그렇기에 동시대미술관을 표방하는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우리는 쉽게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한다.
 
그중에서 나의 기억에 강렬하게 남았던 것은 바로 ‘소리’이다. 물론 오래 전 비디오아트나 퍼포먼스 아트가 등장한 이후로 소리 혹은 소음은 늘 작품의 일부가 되어 왔다. 그러나 내가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소리’는 그저 작품의 일부가 아닌, 그 작품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활약하는 소리이다. 최근 들어 전시실에서 소리를 앞세우는 인상적인 작품을 많이 만나보았기에 그들 중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하려 한다.
 
 
 
이선민 X 리비자 - The Roop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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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민 X 리비자, The Roop, 2020, 2채널 비디오

 

 

이 작품은 2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무용수이자 공연 기획자인 이선민과 DJ로 활동하고 있는 리비자의 협업으로 완성된 프로젝트이다. 큰 화면에서는 이선민이 흰 천으로 만들어진, 한 사람의 몸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 속에서 몸부림친다. 피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흰 천 밖으로 베어나온다. 20분 동안의 힘겨운 사투 끝에 그는 흰 통로의 끝부분에 도달하고, 막힌 부분을 찢고 나와 그곳으로부터 탈출한다. 이는 스스로의 '실존적 자아'를 찾기 위한 고행이다.

 

그리고 옆의 스마트폰에서는 리비자의 디제잉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작품이 출품된 대림미술관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전의 브로슈어에 따르면 리비자는 '소셜 미디어 속에 남아있는 그의 사운드 및 영상, 사진의 기록을 현재 속 이질적 전시장으로 끌어온다.' 나는 디제잉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의 사운드를 전문적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다음을 예상할 수 없는 소리들, 듣기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불쾌한 스트링 사운드, 일정 소리가 계속 반복되는 듯하다가도 점차 심화되는 불안한 음악의 진행이 이선민의 퍼포먼스 속 낯선 불안감을 극대화한다는 점만큼은 명확하다.

 

이선민의 퍼포먼스 속 시작과 끝은 분명하기 그지없다. 스스로 흰 통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힘겨운 몸부림 끝에 천을 찢고 나오는 과정은 지극히 단계적이다. 그러나 리비자의 사운드는 그렇지 않다. 도입부와 절정, 끝맺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의 음악은 제목, 'The Roop'와 같이 끝나지 않는 순환과 같다. 그래서 이선민의 고행의 끝은 리비자의 사운드와 함께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이 작품은 현재 대림미술관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은영 -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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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으로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발표했다. 작가는 젠더와 퀴어 이슈에 관심을 두고, 해방 이후 성행했던 공연 장르인 '여성국극'을 장기적으로 탐구해 왔다. 여성국극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캐릭터는 물론이고 남성 캐릭터까지도 전부 여성 배우들이 연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를 페미니스트-퀴어 방법론과 연결지으며 지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선보였다.

 

공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트랜스젠더 전자음악가 키라라, 레즈비언 연극배우 이리,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의 연출가이자 배우 서지원, 드랙킹 아장맨이 그들이다. 공연을 이끄는 이들의 몸짓은 '신체의 행위'라는 단어로 뭉쳐진다. 이들의 행위는 각 개인의 정체성과 신체의 움직임, 정신과 태도가 기존의 안정적 구조에 반할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공연자들은 순서대로 등장해 스스로의 행위를 실천한다. 다만 키라라의 강렬한 사운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며 공연 전반을 이끌어 나간다. 그가 디제잉을 하는 모습은 영상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지만, 그의 음악은 30분가량의 공연 속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지킨다. 시각예술 웹저널 세미나에서 진행된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키라라의 음악 스타일, 곧 음과 박자를 극단적으로 쪼개는 방식은 그의 성별 정체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신체가 세계와의 불협을 끊임없이 느낀다면 그 경험이 그의 음악 속 비규범적 형식들로 연장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재 아르코미술관의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권병준 - <자명리 공명마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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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병준, 자명리 공명마을, 2019

 

 

권병준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로, 지금껏 여러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실험적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자명리 공명마을>은 그가 작품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관객 참여형 작업으로, 작가는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자신의 소리만 들을 수 있는 헤드폰을 소통의 매체로 활용한다.

 
관람객은 자연을 모티프로 한 음향이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전시공간을 거닌다. 그러다 헤드폰을 쓴 다른 상대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약 4초 간 인사의 몸짓을 취하면 이 둘의 소리는 서로 교환된다. 이는 곧 서로에 대한 경청이자 소통, 다가감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기반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행위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는 지금껏 우리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었기 때문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작가는 헤드폰을 쓴 관람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립된 개인들이 SNS만으로 소통인 척하는 외로운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막말하지 않고 예의를 갖춰 인사하면서 반갑게 다가가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은 작년부터 올해 초까지 개최되었던 부산현대미술관의 <가장 멀리서 오는 우리: 도래하는 공동체>전에서 전시된 바 있다.
 
*
 
위 세 가지 사례 속에서 소리는 작품을 이루는 보조적인 요소가 아닌, 작품의 내용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이때 우리가 경험하는 청각적 체험은 어떤 장소에서의 특정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꽤나 큰 역할을 해낸다. 심지어 소리는 망막을 거쳐 기억된 정보보다 강력하게 각인되기도 한다.

그저 시감각을 제외한 하나의 감각이 더 추가되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음악, 곧 어떤 특정한 소리의 체험은 그곳에서의 경험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기록되기 때문이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들었던 음악을 다시 들으면 그때의 추억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미술관은 우리 일상의 내부로 파고들어온다. 그럼에도 미술관에서의 경험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일상 밖에 있다. 보통의 일상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특수한 체험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체험의 범위가 점차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소리'는 강렬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활약상을 앞으로도 미술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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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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