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의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 혼종
1960년대 이후로 새로이 등장한 미술 장르들에서는 이전까지 찾아볼 수 없던 여러 가지 특징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매체적 다양성이다. 직전 시대까지 모더니즘 비평은 미술의 회화성을 침범하는 연극성, 문학성을 극도로 견제했지만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미술적 시도에서 이루어지는 다학제적, 다매체적 접근은 이내 당연한 것이 되었다.
▲ 이선민 X 리비자, The Roop, 2020, 2채널 비디오
이 작품은 2채널 비디오 설치 작업으로, 무용수이자 공연 기획자인 이선민과 DJ로 활동하고 있는 리비자의 협업으로 완성된 프로젝트이다. 큰 화면에서는 이선민이 흰 천으로 만들어진, 한 사람의 몸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 속에서 몸부림친다. 피인지 모를 붉은 액체가 흰 천 밖으로 베어나온다. 20분 동안의 힘겨운 사투 끝에 그는 흰 통로의 끝부분에 도달하고, 막힌 부분을 찢고 나와 그곳으로부터 탈출한다. 이는 스스로의 '실존적 자아'를 찾기 위한 고행이다.
그리고 옆의 스마트폰에서는 리비자의 디제잉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이 작품이 출품된 대림미술관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전의 브로슈어에 따르면 리비자는 '소셜 미디어 속에 남아있는 그의 사운드 및 영상, 사진의 기록을 현재 속 이질적 전시장으로 끌어온다.' 나는 디제잉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의 사운드를 전문적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다음을 예상할 수 없는 소리들, 듣기 좋은 것과는 거리가 먼 불쾌한 스트링 사운드, 일정 소리가 계속 반복되는 듯하다가도 점차 심화되는 불안한 음악의 진행이 이선민의 퍼포먼스 속 낯선 불안감을 극대화한다는 점만큼은 명확하다.
이선민의 퍼포먼스 속 시작과 끝은 분명하기 그지없다. 스스로 흰 통로 속으로 걸어 들어가 힘겨운 몸부림 끝에 천을 찢고 나오는 과정은 지극히 단계적이다. 그러나 리비자의 사운드는 그렇지 않다. 도입부와 절정, 끝맺음의 경계가 불분명한 그의 음악은 제목, 'The Roop'와 같이 끝나지 않는 순환과 같다. 그래서 이선민의 고행의 끝은 리비자의 사운드와 함께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이 작품은 현재 대림미술관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은영 -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 정은영,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 2019, 오디오비주얼 설치
정은영은 <여성국극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으로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발표했다. 작가는 젠더와 퀴어 이슈에 관심을 두고, 해방 이후 성행했던 공연 장르인 '여성국극'을 장기적으로 탐구해 왔다. 여성국극의 가장 큰 특징은 여성 캐릭터는 물론이고 남성 캐릭터까지도 전부 여성 배우들이 연기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를 페미니스트-퀴어 방법론과 연결지으며 지난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섬광, 잔상, 속도와 소음의 공연>을 선보였다.
공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트랜스젠더 전자음악가 키라라, 레즈비언 연극배우 이리, 장애여성극단 춤추는허리의 연출가이자 배우 서지원, 드랙킹 아장맨이 그들이다. 공연을 이끄는 이들의 몸짓은 '신체의 행위'라는 단어로 뭉쳐진다. 이들의 행위는 각 개인의 정체성과 신체의 움직임, 정신과 태도가 기존의 안정적 구조에 반할 수 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공연자들은 순서대로 등장해 스스로의 행위를 실천한다. 다만 키라라의 강렬한 사운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며 공연 전반을 이끌어 나간다. 그가 디제잉을 하는 모습은 영상의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지만, 그의 음악은 30분가량의 공연 속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지킨다. 시각예술 웹저널 세미나에서 진행된 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키라라의 음악 스타일, 곧 음과 박자를 극단적으로 쪼개는 방식은 그의 성별 정체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신체가 세계와의 불협을 끊임없이 느낀다면 그 경험이 그의 음악 속 비규범적 형식들로 연장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현재 아르코미술관의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권병준 - <자명리 공명마을> (2019)
▲ 권병준, 자명리 공명마을, 2019
권병준은 싱어송라이터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로, 지금껏 여러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다채로운 실험적 작업을 진행해 왔다. <자명리 공명마을>은 그가 작품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관객 참여형 작업으로, 작가는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자신의 소리만 들을 수 있는 헤드폰을 소통의 매체로 활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