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하거나 망하면 글이라도 쓴다는 사람의 절박함 [도서]

글 입력 2020.05.29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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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날 우연히 여름에나 볼 수 있는 시원한 등판이 떡하니 그려져 있는, 책 <여름, 스피드>를 만나게 되었다.


지은이는 김봉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책 속의 어느 한 문장을 보았고, 이미 그 한 문장은 내게 좋은 카피 문구가 되었다. 당장 그 책을 사서 읽어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마음까지 들어 조급히 서점으로 향하였다. 다행히 한 두어권 정도 재고가 남아있었던 걸 확인한 나는 곧장 그 책을 품에 안아 계산을 마쳤다. 그런데도 도저히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서점에 바로 자리를 잡고 책을 폈다.

 

작가에 대한 별다른 사전 정보없이 글을 읽게 된 나는, 그제서야 알았다. 퀴어 소설을 쓰시는 구나,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쓰시는구나. 우연한 무지 덕분에, 0만큼의 색안경도 낄 틈 없이 가장 맑은 눈으로 소설을 읽었던 것 같다.

 

특별한 글이었다. 특별한 사랑이었다. 대체 그의 것이 모두 특별해보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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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부터, 용기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때로는 한계를 벗어난 곳에서 설명없이 설명되기를, 오해로 이해되기를.


- 여름, 스피드


 

'오해로 이해되기를' 바랄 수 있는 마음은 얼마만큼 단단한가. 늘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고자 꼭 한 문장씩 덧붙이는 나와 달리 군살없는 문장들이 가득했던 이야기는 그래서 더 정확하고 더 날렵했다.

 

단 한 소설도 재미없음을, 일반적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의 소설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가끔 몇 몇 글은 '이 사람, 스스로를 위해서만 쓰는 거 아냐?' 할 정도로 나 같은 사람은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이기도 했다.


그 날것의 사랑이, 신기하게도 나의 이야기같아 책에 밑줄을 하염없이 그었었다. 그의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도 그 어느것 하나 보편적이지 않았을테니 결국 그가 쓴 사랑은 사랑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겠구나, 진실된 것이겠구나. 오직 진실만을 말할 수 있게 된 그 용기의 출처는, 사랑이었다.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여름의 사랑


 


그를 올여름처럼 애가 타게 하고 싶었다. 죽을 것 같겠지만 미칠 듯이 짜증나겠지만 그럼에도 견뎌달라고, 나와 같아달라고. 여름밤 다정했던 당신이 여름낮에도, 여름이 지나도 다정하기를 바라면서. (중략) 태풍도 장마도 다 지나간 진짜 여름, 끓어 날아가고 부풀어오를 당신과 나, 그것이 오해나 착각으로 가득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어쩌면 내가 먼저 말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무엇보다 당신을 실-감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 시절과 기분


 

'죽을 것 같겠지만 미칠 듯이 짜증나겠지만', 그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름과도 같은 사랑은 애가 타면서도 견디는 사랑이고, 여름의 낮과 밤의 상반된 분위기처럼 가늠할 수 없는 당신과 하는 사랑이다.


덥다, 더워! 하면서도 이열치열 외치는 한국인이서랄까, 사랑이라는 고통을 사랑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몸부림이 특히 여름에는 더 잦은 것만 같다. 태풍과 장마, 여름이라는 계절에 도저히 익숙해지기 힘든 궂은 날씨들을 순식간에 보내고 나면 머지 않아 찾아올 평화.


'쨍쨍'한 햇빛이 곳곳을 훤히 비추는 진짜 여름 날엔 부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특히 눈을, 그리고 눈에도 비친 당신의 모습을 꼭 확인해보길 바란다. 그렇게 여름은, 실감하는 계절이다.

 

 

 

내가 너랑 사랑하거나 망하면 글이라도 쓴다




나의 글쓰기만큼 내밀한 사랑을 당신이 이해해줄 수 있을까? 나의 사랑만큼 내밀한 글쓰기를 당신이 이해해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고, 시작되고, 어느 순간 이어져 있음을 기뻐하다 다시 끊어졌다 이으려 하고, 우리는 이어질까?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나는 이어지게 될까? 당신과 내가 이어져 있음을, 이어져 있었음을, 그 환희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하고 글을 쓴다. 그를 쓴다. 이야기가 된다는 내밀한 확신에서 오는 희열을 나는 버리지 못하고, 그 어리석음, 단절을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나는, 모든 것을 잇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여 글을 쓴다.


- Auto 중

 


글을 쓰게 되면 다른 누군가와의 일 조차도 온전히 내 것인, 내밀한 일이 된다. 그러니 이 '글이라도' 쓴다는 말은 결국 내게 사랑이 있게되건 없어지게 되건, '온전한 나의 것'인 '글'만큼은 남는다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없다. 자신의 사랑을 애써 포장하지도, 정리하지도 않고 보여주는 그의 글은, 대신 사랑하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사랑은 정말이지 사람을, 사람들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으며 느꼈다.

 

*

 

그는 사랑을 글로도 쓰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 자체로 그의 사랑은 담보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담보 받기위한 글, 그래서 틀림없어야만 하는 그의 글과 사랑은 절박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절박함이, 그가 특별한 이유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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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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