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혼이 소진되지 않도록 - 비브르 사 비 [영화]

글 입력 2020.04.2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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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집에 누워 빔 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다 가끔 생각한다. 현대에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


전염병이 유행하고 있지만 2020년 현재의 나는 굶주리지도 않고, 위생적인 환경에 있으며 편리하게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게다가 한국이라는 소득 수준이 괜찮은 국가에 살고 있다. 이토록 쾌적하게 살고 있는데도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갖기가 어렵다. 사람들의 마음은 병들어 가고 있다. 우울과 무기력감, 그로 인한 폭력성은 증가하고 있다. 그 끝은 약자에게로 향하거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우리는 자유롭고 풍요로운데 '나'는 왜 점점 작아져 갈까?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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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감독의 영화 <비브르 사 비>(1962)는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다.


고다르는 평화롭고 평등해 보이는 60년대 프랑스의 이면에 존재하는 불안과 허무를 '나나'(안나 카리나)의 삶을 통해 그려냈다. 영화의 제목인 'Vivre Sa Vie (비브르 사 비)'란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12장으로 구성된 나나의 삶의 단편들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영화배우를 꿈꾸는 나나는 가난한 청년이다. 음반 가게에서 레코드를 팔지만, 그 돈으로는 집세를 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친구를 통해 포주 '라울'(사디 르보)을 만나게 된 나나는 결국 성매매 일을 시작하게 된다.


원하던 대로 돈을 벌고 있지만 배우라는 꿈은 흐릿해졌다. 휴일에도 포주와 함께 해야 하며 자유롭게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도 없다. 포주인 라울은 손님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나나를 갱단에 팔아넘기려 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족쇄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어.

우린 자유로워."

 

 

남편의 배신으로 성판매를 시작하게 됐다는 친구 이베트(길렝 슐룸베르제)의 얘기를 듣고 나나는 '책임'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이 말은 작품 전체를 통해 부정된다.

 

자신의 불행조차 본인의 책임이라 담담하게 말하던 나나는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다.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지만 갈수록 잔혹한 현실에 얽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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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1928) 의 눈물에 감응한 나나의 눈물은 다르지 않다.


순교가 승리이고 죽음이 곧 구원이라 말하는 잔 다르크의 마지막 모습은 혹독한 삶 속에서 진리를 좇고자 하는 나나의 의지와 맞닿아있다.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태도와 자유롭다는 믿음은 현실의 벽 앞에 산산이 부서지지만 클로즈업을 통해 보이는 그 눈물은 영혼의 고결함을 담아낸다.

 

나나는 행인이 흘린 1천 프랑을 몰래 숨기고 있다가 들키고 만다. 행인은 1천 프랑을 돌려받고 나나를 고소한다. 행인의 처우에 나나는 억울해한다.


 

"모르겠어요. 너무 심한 것 같아요."



분명 나나의 행동에 비해 과한 처사다. 이것이 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라 해도 너무하다. 나나의 인생도 이 상황처럼 과한 불행을 짊어지고 있다. '내 불행도 나의 책임'이라고 말했지만 나나의 불행은 본인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과하다. 인생의 불행은 불가해하다. 우리의 잘못에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불행을 정확하게 부과해 주는 것 같지 않다.

 

자신의 불행을 짊어진 나나는 자유로운가? 자유라는 이름의 족쇄를 찬 걸까?

 

 

 

나의 삶


 

자신의 삶이라는 말만큼 허황된 말도 없다. 미소 지어 보라고 하면 미소 짓고, 옷을 벗으라고 하면 벗고, 상품으로 누군가에게 팔리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 아니다. 행위를 하는 육체는 자신이지만 선택권은 타인에게 있다. 나나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삶의 대척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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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에서 당구대 주위를 돌며 자유롭게 춤을 추는 나나의 모습이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그 자유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9장의 제목 '행복한지 자문하는 나나'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의 몸을 파는 행위가 행복할 수는 없다. '쾌락'과 '행복'의 간극은 '돈'으로 메울 수 없다. 그렇다면 나나는 어떤 삶을 살기를 원했을까?

 

카페에서 만난 노년의 철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나나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말과 침묵의 사이에서 고요한 곳으로 향하고자 했던 마음과 말의 덧없음을 고찰하는 태도는 성매수자 남성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야 하는 자신의 생계유지 수단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랑을 진리라 생각하는 태도 또한 성매매와 대비되는 요소이다.


 

"말을 할수록

그 말의 의미가 사라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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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의 죽음은 담백하게 묘사된다. 간결한 장면의 묘사는 오히려 큰 파장을 가져온다. 왜 나나의 삶은 그렇게 끝나야 했는가? 잔 다르크에게 죽음이 구원이었듯 나나에게도 죽음이 구원이었을까? 나나의 삶은 그의 것이었나?

 

 

 

안나 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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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에서 감독인 장 뤽 고다르의 목소리로 읽은 에드거 앨런 포의 '타원형 초상'은 '연인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의 이야기이다. 초상화를 완성한 화가가 그림이 살아있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옆을 보자 연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소설의 내용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고 연기하며 성판매를 하지만 나나의 영혼은 점차 소멸된다. 한편 실제 고다르의 연인이었던 안나 카리나가 주인공 '나나'로 그려지는 감독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안나 카리나는 <비브르 사 비> 이후 성공적으로 배우의 길을 걸었지만 나나를 연기하며 그의 영혼에 어떤 파장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지루하고 아리송한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은 안나 카리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장 뤽 고다르라는 '누벨바그의 아버지'라 불리는 재능 있는 감독의 힘도 있지만 이 영화에 한해서는 안나 카리나라는 배우의 힘이 강하다고 느낀다.


특히나 9장의 춤추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안나 카리나의 에너지는 독보적이다. 보기 어려운 영화더라도 9장까지는 보기를 권한다.


안나 카리나만으로 볼 가치가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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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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