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득 나를 돌아보다 [사람]

앞으로 몇 번이고 곱씹을 나의 페미니즘
글 입력 2020.04.17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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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사적이지만, 사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

 

 

 

어느 이십 대 여성의 삶


 

인생의 모토였다. 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해낼 수 있지만, 어렵거나 힘들거나 새로운 일은 할 수 없다고. 실패할 거니까 굳이 없는 비용 들이지 않는 게 낫다고. 비관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관'의 다른 말을 아는가. '현실적'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악을 고려하며 미리 생각하는 버릇을 뒤집어 보면, 일부는 현실로 나타난다. 때로는 상상 그대로다. 최대한 나쁘게 생각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괴로움이란. 모순적이게도 괴롭기에 안심이 된다. 미리 생각해두었으니 이 정도지, 근거 없는 긍정을 바랐다면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나.


늘 자신감이 없었다. 남 눈치를 많이 보던 탓이었다. 내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남이 보는 나에 신경 쓰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까, 타인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 셈이다. 살면서 타인의 관점을 빌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은 필요하다. 발전을 위해. 다만 내가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나의 외적인 면이라는 게 문제였다. '예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았고, 탈색과 염색을 반복하면서도 긴 머리를 고수하려 했고, 나에게 어울리는 색, 일명 '퍼스널 컬러'에 맞는 색조에 집착했다. 화장이 잘 먹은 날은 기분이 좋았고, 화장이 뜨거나 잘 안 되면 기분이 별로였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예뻐지고 싶었다. 예쁘게 보이는 내가 좋았다. 수동적인 위치를 자처했다.


화장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사실에는 문제가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왜 획일적일까? 왜 성별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까? 사람은 저마다 같은 듯 다르고 각자의 취향이 존재한다. 그런데 여성의 치장은 한 스타일을 끝없이 모방한다. '투명 메이크업', '살구 메이크업', '상큼 메이크업'처럼 메이크업 '이름'만 다르다. 그러나 아이섀도나 립스틱 색은 고만고만하다. 하늘 아래 다른 색조는 없다는 합리화에 빠진 채로.


정말 타인에 대한 의식 없이 '자기만족'이라면, 좋아하는 색을 마음껏 칠해볼 수 있지 않은가? 왜 거기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되려 그 기준에 못 미치는 자신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남들이 '예쁘다'라고 말해줄 그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가? 여성들은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체득한 여성의 문화에 질문을 던져보자는 의미이다. 화장을 필수처럼 하고 다닐 땐 깊게 생각하지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특히 한국에서 '화장하지 않는 여성'은 별종이고, '훈녀 만들기'로 꾸며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정의했으니까.


화장과 긴 머리 혹은 일명 '여자 머리' 속에 의무감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물론 법전에도 교과서에도 '여성은 이래야 한다'고 적혀있지 않다. 문화란 그렇다.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다고 해서 미디어에서 주입하는 여성상도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변화의 시작점, 페미니즘


 

나에게 인생 책은 없지만, 인생을 바꾼 책이 있다. 한 2년쯤 봄이었을 거다. 할 일 없던 휴학생은 5만 원 한도의 공짜 문화생활비를 얻고, 신이 나서 교보문고에 갔다. 어떤 소설을 살까 고민하다가 베스트셀러 섹션 앞에 멈췄다. 당시 교보문고 1위 도서, 82년생 김지영이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 나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베스트셀러 1위지? 책에 대한 논쟁이 심하다는 것은 어렴풋이 들었다. 궁금했다. 그냥 소설일 뿐인데 왜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지. 책을 살짝 들춰보다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을 다시 폈다.

 

첫 장을 읽었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

3년 전 결혼해 지난해에 딸을 낳았다.



페이지를 훌쩍 뛰어 43페이지였다.



김지영 씨는 49명 중 30번이었다.

남학생이 1번부터 27번,

여학생이 28번부터 49번이고

번호는 생일 순서로 매겨졌다.



103페이지.



그 이후에도 숱하게 면접을 보았고,

종종 외모에 대한 지적이나

옷차림에 대한 저속한 농담을 들었고,

특정 신체 부위를 향한 음흉한 시선,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겪기도 했다.

취직은 하지 못했다.



마지막, 175페이지.



물론 이 선생은 훌륭한 직원이다.

얼굴은 고상하게 예쁘면서,

옷차림은 단정하게 귀엽고,

성격도 싹싹하고, 센스도 있다.

(중략)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읽은 책은 처음이었다. 단순한 픽션이 아니었다. 유년기 여성, 십 대 여성, 이십 대 그리고 삼십 대까지 담겨 있었다. 과장 하나 없는 사실의 나열이었다. 최근 개봉했던 원작 기반 영화까지 보고서야 책에 나온 '빙의'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남들을 이해하려고 애쓴 나머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아예 타인이 되는 것이다. 김지영 씨는 이해할 수 없는 갑갑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다 보니 자신마저 타인의 시선으로 보았다.


사회는 획일적이다. 다양한 개인은 사회 안에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어 분화된다. 두 성별의 문화, 두 성별의 특성, 두 성별의 취향, 두 성별의 관점이 생긴다. 사회적 약자, 차별의 당사자인 여성은 채용•승진에서 밀려나고, 동일 직급임에도 임금을 덜 받고,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면 이 임금마저 포기해야 한다. 성 착취,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어서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 교육부에서 시행한 성교육 매뉴얼대로 말이다. 뿌리 깊은 여성 혐오 사회를 직면하면, 패배주의적 비관에 빠지기 쉽다. '개인이 뭘 한다고 세상이 변해?'라며. 그런데 당신이 여성인 이상, 이 땅에 살아가기를 택한 이상,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시사인에서 진행한 흥미로운 분석 결과가 있다. '20대 남자 현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동영상 내용의 일부를 요약하자면, 20대 남성들은 여성들이 차별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남성들은 차별받는다고 느낀다. 법 집행에서도 남성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바라는 운동이라고 인지하지 않기 때문에. 즉, 페미니스트를 여성 우월주의자의 집합체로 본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극단적이고 변질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온라인에서 흔히 말하는 '극단적 페미니즘'이 정말 현실에 존재하는가?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있나? 남성이기 때문에 채용, 임금, 승진 관련 차별을 받는가? 물론 저 '20대 남자 현상'에 속하는 일부는 마지막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여성이 노력하지 않아서 임금 차별이 생긴다고 보니까.

 

문득 여자 연예인 몇 명이 떠오른다. 말투가 애교스럽지 않고 딱딱해서 욕먹은 배우, 말수가 적고 웃지 않아서 욕먹은 아이돌, 'Girls can do anything'이 적힌 핸드폰 케이스를 꼈다는 이유로 욕먹은 또 다른 아이돌. '극단적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면, 최소한 여성의 행동거지를 억압하는 사회가 없지 않을까.


페미니즘을 접하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무엇이든 나의 능력을 의심하고 탓했던 습관을 버렸다. 자만과는 다르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택했다. 내 의견을 뚜렷하게 표현하기를 두려워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플랫폼에 글을 게시하는 일이 놀랍다. 유튜브로 얼굴도 드러냈다. 내 생각, 나의 의견, 나의 바람, 나의 열망을 조금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서로 북돋우며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물론 예전의 나처럼 방황하는 사람들까지.


나는 여기서,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거대한 질문이다. 그러나 답은 어렵지 않다. 나는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같은 일에 같은 대가를 받고, 같은 안전과 같은 권리를 보장받는 삶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불편과 부조리함,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에 더는 겁먹지 않을 것이다.

 

 

 

박윤혜.jpg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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