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일의 오늘 :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도서]

글 입력 2020.04.0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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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선물을 받았다. 책을 준 이는 물끄러미 책 표지를 바라보는 나를 보다가 다들 재미있다고 추천하는 책이라며 연신 강조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정말 유명한 책인지 이름은 익숙했다. 하지만 어떤 작가가 쓴 책인지 어떤 장르의 책인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검색을 해보았다.

 

김초엽 작가의 SF 단편 소설. 익숙한 단어는 단편뿐이었다. 이전에 봤던 SF 영화들은 어째 전부 취향이 아니었고 (최근에는 조금씩 읽어 버릇하고 있지만) 소설이라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책의 두께를 보고 있자니 내가 이걸 과연 읽을 수 있을까 겁부터 났다. 그렇게 책꽂이에 고이 모셔둔 책은 몇 가지 일들을 해결하느라고 받은 지 2주가 조금 지나서야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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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SF 단편 소설


 

SF 단편 소설은 두 번째다. 처음으로 읽었던 건 '땡스 갓, 잇츠 프라이데이'였다. 아직도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SF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과학 용어들로 버무려진 이론들이 난무할 것만 같았다. 그러니 나는 쉽게 읽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껏 읽어온 몇 권 안 되는 소설 중 가장 재미있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같았다.

 

두 책을 재미있게 읽은 이유는 '가능성' '시선'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소설 속의 일들은 미래에 정말 일어날 법한 것들이었다. 아니 당장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일련의 이야기들이 향하는 시선의 끝에는 인간이 있었고, 그 시선에는 호소력이 짙게 배어 있었다.

 

과학과 인류학이 함께할 때 나는 그들에게서 묵직한 매력을 느낀다. 다가올 수많은 날 중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문제들을, 어쩌면 이미 발생했지만 애써 외면하고 사는 것들을 친절하게 작가의 방식으로 눈앞에 그려준다. 이들이 주는 여운과 이어지는 생각은 그 매력만큼이나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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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물성


 

일곱 개의 소설 중 기억에 남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인 「감정의 물성」. 문구류를 만드는 평범한 회사였던 이모셔널 솔리드가 어느 날 장사를 접고 1년 만에 다시 등장해서 '감정의 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라인을 내놓는다. 이 라인의 제품들은 감정을 조형화한 것으로 우울체, 공포체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

 

주인공 '정하'는 이 제품들이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감정이 조형화된 것이 아닌 플라시보나 환각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하가 의문을 가진 것은 사람들이 행복, 편안함 따위의 긍정적인 감정뿐만이 아닌 우울, 분노, 공포와 같은 감정도 산다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정하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피하고 싶은, 심지어는 괴롭기만 한 감정들을 사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잠시 멈추어 내내 고민을 하다가 책장을 넘겼고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기억에 남는 구절 하나(위 사진의 내용)를 만났다.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한다. 그리고 감정에 따르는 의미를 추구한다.

 

사실 의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내가 재미있게 봤던 영화들만 해도 싸이코틱 했으면 했지, 썩 밝은 분위기의 영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감정을 느끼기로 선택했다. 그 감정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혹은 어떤 의미를 두었는지는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은 의미 없는 감정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의 구분이야말로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관내분실


 

죽은 엄마를 잃어버렸다. 사후 죽은 사람의 영혼이 데이터로 이식되는 '마인드 업로딩' 기술이 생기고 마인드를 보관해 놓는 도서관이 생겼다. 사실 생겼다기보다는 종이책이 사라지며 도서관의 역할을 하던 곳을 봉안당과 같은 곳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지민은 임신을 한 후 엄마의 부재를 느꼈다. 지민에게 엄마는 애증과도 같았기에 엄마가 죽은 후에도 마인드에 한 번도 접속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찾은 도서관. 3년 전 죽은 엄마의 인덱스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방법을 찾던 중 도서관 측에서 지민에게 새로운 시도를 제안한다.

 

저장된 마인드들을 기반으로 표준형 인공 뇌에 외부 자극을 기록해 시냅스 패턴을 형성하고, 그 패턴과 가장 강력한 상호작용을 보이는 마인드를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와 연관이 큰, 엄마를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했다. 지민은 선택권이 없었다. 도서관 어딘가에 존재하는 죽은 엄마를 찾아야 했다. 지민은 엄마 은하를 고유하는 물건을 찾아 나선다.

 

읽으며 엄마가 떠오르는 건 당연했다. 엄마와 같은 물건은 무엇이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애석하게도 네모나고 조금 똑똑한 전화기만 떠올랐다. 내가 사는 이 세계에도 인덱스 없이 어딘가에 외로이 규정되지 못한 감정들이 떠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중 나의 것도 여러 개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과학이 이성이고 인간은 감성이라면 「관내분실」은 감성의 영역이 큰 소설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과학 기술의 형태는 이질감 없이 이야기에 자국도 없이 스며든 지 오래였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다시 찾은 감정이 선명해졌다. 감성의 외연을 둘러싼 이성이 감정을 돋보이게 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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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오늘


 

미래에 대한 시선은 과거의 반추가 된다. 내일의 오늘은 어제를 통해 또다시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묻게 만든다. 일곱 개의 소설은 인간의 탄생과 본성에서부터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시선 그리고 죽음과 소멸까지 아우르고 있다.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또 차가울 것만 같았던 SF 소설은 모호했다. (여기서의 모호함의 부정적 의미의 모호함이 아니다)

 

억지로 머릿속을 헤집어 감정을 촉발하고 과제를 주지 않는다. 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누우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듯, 잔잔한 파도 같은 이야기 위로 힘을 주어 심해로 밀어 넣은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가만히 그 움직임과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게 된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안온했다. 좋아하는 것이 생긴다는 건 행복이다. 나는 오늘 좋아하는 SF 소설책과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싶은 작가가 생겼다.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가 오늘의 연속 안에서 무언가 희미해져 갈 즈음에 다시 꺼내어 읽고 싶은, 또 다른 존재에게 내밀고 싶은 책. 이 책을, 시간을 선물해 준 이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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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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