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컬트가 뭔지도 모르면서 봤더라? ② [TV/드라마]
선악은 한 사람의 몸 속에 같이 있어서 귀신보다 인간이 무서운 거여
글 입력 2020.03.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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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이라는 말은 무교인 나에게 어딘가 거북하다. 최근에 신천지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신종 코로나19 대응방향에 비협조적인 모습 때문에 많은 영상을 접하게 됐다. 맨 처음 본 영상에 달려있는 제목이 ‘탈출 간증’이었다. 종교적 체험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비종교인에게 종교적 어휘는 모두 어색하게 느껴진다.
오컬트 장르 또한 그런 취급을 받았던 시절이 있다. 아니, 그 이전에 한국의 전통 오컬트, 무당의 존재가 그러하다. 샤머니즘에 대해서 배우기 전부터 나에게 ‘무당’은 이미 존재했다. 오히려 뒤늦게 정의하게 된 이 샤머니즘이라는 것이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직도 가끔은 무당이 샤머니즘을 위에 있는 범주인 것만 같다.
무속인도 이런 ‘종교체험’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으나, 신을 내려 받아야 한다는 신병 또는 무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대개는 ‘기존의 삶을 포기’하거나, ‘신을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한국 샤머니즘은 오방기를 이용하는 화려한 색을 가짐에도 기존의 낮은 신분을 타파하기 어려워 보였으나, 근래 들어서는 이런 무속인들에게도 서사의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1편에 이어서 한국의 오컬트 장르를 4가지, 융합, 퇴마, 전쟁, 사이비로 구분해 보았다.
전쟁
오컬트 장르가 변모를 추구하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한국 무속인들이 힘을 펼치기 시작했다. 악을 쫓아낸다고 끝나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의 욕망과 흐릿한 선과 악의 경계를 조명하기 시작했고, 어떤 부분도 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에게 스며들어 갈등을 일으킨다. 영상미디어에서는 이런 갈등을 인간의 형상으로 만들어 서로 해를 입히는 ‘전쟁’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무속인이 ‘살을 날린다’라고 하는 공격법을 기초로 한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2016)>에서 딸에게 귀신이 빙의한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오컬트의 서사를 따른다. ‘여성’의 역할은 영이 넘치는 무속인과 영이 약해 빙의가 되는 신체,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해 <곡성>에서는 이례적으로 남성 무속인을 설정했고, 수호신이라는 새로운 샤머니즘 여성 역할, 그러나 한국의 민속신앙적 요소를 들고 왔다. 고정적인 성별 역할을 뒤집으며, 서사는 관객들에게 혼란은 야기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제의 출현과 일본에서 넘어온 외지인이 끼어들면서 마지막까지 ‘뭣이 중한지’ 분간이 서지 않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살을 날리고, 짐승을 제물로 하고, 피가 낭자한 영화의 장면들은 ‘나쁜 놈’을 구분하고자 하도록 관객의 생각을 설계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람객이 ‘곡성 결말 해석’을 검색해 본다. 못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누가 나쁜 놈인지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1편에서 소개한 드라마 <손 the guest>는 드라마판 <곡성>이라고도 칭해지기 때문에 역시 전쟁의 구조로, 선악의 구분이 힘들다. 무속인은 부정적이며, 공포감을 주는 역할이어야 하나,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 이 싸움 속에서 경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진다. 또한 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현실사회를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이름을 알 수 없는 외지인은 규명할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악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방법>에서도 실존하지 않는 ‘방법’, 귀신을 이용해 인간에게 신체적 해를 입히는 주술을 사용한다. 이제는 한국 무속신앙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을 넘어섰다. 신을 인간의 영리에 맞게 이용한다. 인간이 뛰어나서가 아닌, 인간의 욕심이 거대한 크기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사이비’, 이단이라고도 부른다. 두가지 모두 전통적인 것에서 벗어난 아주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데, 종교계에서는 가짜종교를 일컫는다. 내가 모든 무교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한국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 천주교나 가톨릭과 접점이 있던 어린 시절에서 비롯된 현재의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나는 그 어떤 종교에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형종교와 숙주종교가 있을 뿐이다. 노아의 방주에 기도하지 않는 동물들을 왜 태웠단 말인가?
구제를 바라는 사람들의 구석을 파고들어 갈취하는 것을 ‘사이비’라고 지칭한다면, ‘사이비’는 이미 약한 사람들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격이다. 바닥까지 긁어 모아 이득을 취하는 것이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들 한다. 종교가 무형의 존재에 집중함을 이용한다.
“인간이 귀신보다 무섭다.”라는 말이 흔히 통용되듯, 최근에는 이런 사이비를 소재로 미디어가 재생산되고 있다. 드라마 <구해줘>는 두번째 시리즈까지 성공적으로 종영했으며, 영화 <사바하>를 거쳐 방영중인 드라마 <아무도 모른다> 외에도 익히 쓰인다.
특히 <구해줘 2>에서는 선의 상징이었던 사제가 사이비 교주의 편에 선다. <구해줘 1>이 누가봐도 사기꾼스러운 캐릭터들이 출연했다면, 다음 시리즈에서는 평범하다 못해 마을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결국엔 시작점이다. 반대로 구제자는 모두의 질타를 받는 인물이다. 살인자를 정당화하는 플롯은 절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드라마 전체에서 선악이 도치되는 것을 보여준다.
‘해악은 멀리 있지 않다’라는 주제는 항상 순진한 시골마을과 노인회관 등지에서 일어난다. 선과 악의 대립을 극대화시키는 모습이다. 이 사이비 서사가 흥미로운 점은 긍정적인 이미지의 개신교와 카톨릭의 이미지를 이용해 극악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진정한 악은 인간이다.’ 라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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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와 드라마는 개인 간의 사랑타령을 벗어나고 있다. 갈등의 시야를 넓힌 것이다. 문제들이 이름을 가지고, 조금 더 한국 사회의 실상에 집중해 나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배우 정유미 주연의 장난감 비비탄 총으로 퇴마하는 신입교사의 이야기, 영화 <보건교사 안은영>과 죽은 딸의 심장 안에서 악마가 깨어난다는 영화 <사흘>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쩌면, 한국식 오컬트에 이미 둔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개인의, 사회의 내면을 공론화할 수 있는 역할은 일찍이 시작한 영화 <엑소시스트>가 지금까지 변화해 오면서 소멸하지 않을 수 있던 것처럼 새로운 충격을 가해 줄 서사방법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내가 어두운 박스를 품고 있으면 다행이겠다. 애초에 그 상자 안에 있는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없다. 밝기에 따라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는지는 더더욱이 알 수 없다. 오컬트 장르가 내게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는 모든 사건에 이유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는 인간의 습관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또,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언제나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속을 찝찝하게 긁어 놓는 이 오컬트라는 장르가 나는 좋다. 지속적으로 나를 시험한다. 질문을 던진다. 의심을 하게 한다. 나는 나에 대한 의심의 끈을 놓지 않게 된다.
백소연 (2019). 「손 the guest」에 나타난 악의 재현 방식과 그 의미. 어문론집, 80, 213-239.이채영 (2018). 영화 검은 사제들과 곡성에 나타난 퇴마 소재 스토리텔링 기법과 악의 이미지 연구. 어문론짐, 74, 97-135.황혜진 (2015). [영화(1)] 한국형 오컬트 영화의 가능성. 공연과리뷰, 21(4), 179-183.[박나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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