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며 -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글 입력 2020.03.18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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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다. 3호선 남부터미널 역 5번 출구의 기다란 계단을 올라오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에 오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한쪽에선 보도블록을 정비하느라 사람과 기계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그들을 지나쳐 예술의전당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마스크를 써서 그랬을까. 그냥 걷기만 했을 뿐인데도 숨이 가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스크를 벗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은 코로나가 맹렬하게 활개를 치고 있었으니까.

 

답답함을 참으며 한참을 걷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코트에다가 터틀넥을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하게 떨려왔다. 날짜는 벌써 3월인데 아직은 봄이 아닌가 보다. 이번 겨울은 별로 춥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히 햇빛은 좋았다. 중간중간 바람이 잠시 쉬어가는 사이, 쏟아드는 햇빛은 등을 안온하게 감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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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건물 안으로 들어서 마자 눈에 보이는 건 손 세정제들의 행렬이었다. 앞선 사람들이 한두 방울씩 짜내 손에 문질렀다. 나도 그들을 따라 손 세정제를 발랐다. 안 그래도 바람 때문에 시렸던 손이 더 시려졌다. 손들을 급히 코트 주머니 속으로 감추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가람 미술관을 찾아야 했다. 그때 천장에 매달린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된단다.


길을 따라가니 한가람 미술관이라고 써진 간판과 유리 문이 눈에 들어왔다. 너머에는 계단이 있었다. 저기로 올라가면 되는 건가. 발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한 층을 올라가니 매표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을 따라 나도 줄을 섰다. “아트인사이트에서 왔어요.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전시 때문에요.” 이윽고 내 차례가 다가오자 나는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서 순간 당황한 낯빛이 스쳐 지나갔다. 죄송하지만 손님, 여기는 툴루즈 로트렉 전시 매표소인데요.

 

밀려오는 민망함과 함께 그녀로부터 내가 가야 하는 제7전시실은 지하 1층으로 가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고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지하라고? 하지만 내가 아까 지나쳤던 지하에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는데? 나는 유리 문의 오른 편에서 길을 막고 있던 엘리베이터를 떠올렸다. 한가람 미술관으로 향하는 지하 1층의 통로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더 이상 없었다. 슬며시 짜증이 밀려왔다. 길치의 씁쓸한 결말들이 떠올랐다. 아, 나는 여기서 또 헤매게 되는 거야?


별 수없이 도로 예술의전당 입구로 돌아왔다. 핸드폰으로 검색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때 내 뒤로 어린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이 지나갔다. 그들을 좇아 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내가 그토록 찾던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좁디좁은 나의 시야가 경이롭게까지 느껴졌다. 동시에 멱살도 잡고 싶었다. 도대체 그 정신머리로 어떻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온 거냐, 나라는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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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에서는 2020년 2월 26일(목)부터 4월 23일(목)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를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과 2018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의 우승자인 Vendi Vernic의 특별전,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작, 보림출판사의 그림책 전시 등 어른들을 위한 일러스트 원화 작품들과 다양한 그림책 전시를 만나볼 수가 있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하여 2019년 53회째를 맞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천여 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이 전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최고의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을 통해 최종 70여 명의 작가들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하고 작품 전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선정한 작품들의 전시는 실험적이고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 일러스트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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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을 소개하는 코너를 지나면 재작년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의 우승자인 벤디 베르니치의 특별전이 우리를 처음 맞이한다. 그녀가 작업한 동화 ‘동물원’은 강아지, 고양이, 새, 그리고 포획한 여우를 데리고 이국적인 야생동물로 분장시켜 집을 동물원으로 만들려는 다섯 형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이 아이들의 터무니없는 꿈은 호락호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책 속에서 등장하는 아이들과 동물들을 귀엽고 익살맞다.


그림책이 한국어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자세히 알 순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동화책을 누가 글로 읽나. 그림으로 읽지. 종이를 잘라 표현한 체스판과 삐죽삐죽 그어진 선의 자국들이 시선에 선명하게 날아와 박혔다. 언뜻 보면 굉장한 실력을 갖춘 작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의 낙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율은 어긋나 있고, 인물들의 표정은 마치 대놓고 휘갈긴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어렸을 적, 학교에서 쉬는 시간마다 친구와 함께 노트를 반으로 나누어 빼곡하게 채우던 만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일본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인 ‘토고 나리사’가 그린 <완벽한 여행의 날>은따뜻하고 식량이 풍부한 남쪽 땅으로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가는 직박구리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이다. 그녀는 우연히 날아가는 새떼를 보고 영감을 받아 해당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옆에는 실제로 그녀가 직접 핸드폰으로 촬영했다는 철새의 군무 영상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한 마리에 불과한 새가,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이 작은 동물의 이야기가 작가의 애정과 공감 속에서 되살아나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빚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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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다양한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모자를 잃어버린 여우의 여행을 다룬 유케 리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아빠와 아이들의 일상을 다른 홀만 왕의 작품도 있다. 중국 출신의 작가 펭우는 제주도를 여행하고 <귀여운 섬>이라는 작품을 남겼는데 그림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한글 간판이 반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 전시된 그림들이 모두 낭만과 동심을 자극하는 예쁜 작품이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얀 베이직이 그린 <아리아드네의 실>은 고대 그리스 신전의 변화를 떠올리게 한다. 마이렌 아시아인 로라의 그림은 몽상적이다. 위 쟝의 작품은 신비롭고 그로테스크 하며 안드레 레트리아는 전쟁을 소재로 우울한 세계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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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인 무초 마나카의 <산>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산>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원전 사고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작가의 고향을 그린 작품이다. ‘인간은 도망칠 수 있지만, 산과 바다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작가의 죄책감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그림 속의 산과 바다를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대한다.


밀려드는 화염과 형형색색의 방사능으로부터 산과 바다는 두려워하고, 고통받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기에 그 모든 걸 그대로 감내한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라고 하기엔 그림이 너무 기괴하고 무섭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그 모든 감정들이 2011년 당시 그곳에 있던 생명들이 겪어야 했던 감정임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기도 한다.

 

이번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을 준비하며 작품을 선발하던 심사위원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내 작품과 다른 모든 종류의 다양한 스타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동화에는 마음껏 상상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한다. 집 안에 동물원을 만들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는 아이들을 그저 바라보고, 움직이지 못하는 산의 아픔을 공감하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새의 세상을 들여다보는 곳. 그곳에서는 누구도 하나의 답을 정해두고 정해진 답을 좇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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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전과는 다른 기다랗고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앙증맞은 의자와 책꽂이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각각의 책장에는 형형색색의 동화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사람들은 마치 서점에 온 것 마냥 자유롭게 책을 꺼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읽는다. 묵혀 있던 동심을 간질이며 시작한 이번 전시는 다시금 우리의 삶에 동화를 던져 놓으며 끝을 맺는다.


각자의 시간 속에서 그만큼의 나이를 먹은 어린이들은 잊고 있던 동화를 마주하며 그 시간들을 거슬러 오른다. 세상에 대한 희망과 이상을 배우던 때를 떠올린다. 그리하여 결국엔 우리는 모두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고야 만다.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 BOLOGNA ILLUSTRATORS EXHIBITION 2019 -



일자 : 2020.02.06 ~ 2020.04.23

 

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입장마감 오후 6시 20분)

 

*
매주 월요일 휴관

공휴일 및 주말 관람 가능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

 

티켓가격
일반 : 12,000원
청소년 : 10,000원
어린이(36개월~13세) : 9,000원

 

주최
예술의전당, ㈜씨씨오씨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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