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실은 늘, 예뻐지고 싶었다 [사람]

글 입력 2020.03.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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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으로 보톡스를 맞았다. 평생 가지 않을 것만 같던 장소였다. ‘ㅇㅇ클리닉’이라는 간판이 떡하니 적힌 건물 안을 들어서면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멋쩍게 병원 문을 열었다. 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병원 내관은 여타 병원들과 다름없었다. 비슷하게 고요했고, 비슷하게 깔끔했다. 엉덩이에 감기 주사를 맞듯이 시술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속전속결로 끝났다.


양쪽 턱에 각각 세 방. 얼굴이 뻑뻑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심각해지기엔 나를 제외한 모두가 평온했다. 이렇게나 별 것 아닐리가 없다며 괜히 운동은 해도 되는지, 음주는 언제부터 되는지 등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들을 하고 병원을 나섰다. 인생 첫 성형 시술을 마친 후 강남 한복판에 선 사람의 기분이 원래 이런 건가. 갸름해질 얼굴이 기대된다기 보다 한동안 자괴감으로 힘들었다. 내가 결국 받고야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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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빠르망>(1996)

 

 

썩 예쁜 외모가 아니라는 것은 알게된 건 오래 전 일이었다. 아마 11살 때였을 것이다. 시민회관에서 무슨 공연이 열린다기에 친구와 달려갔다. 조금 늦었지만 다행히 자리가 좀 비어있었고, 사람들을 비집고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 때 뒤에서 한두살 위로 보이는 오빠들이 우리를 톡톡 쳤다. “여기는 예쁜 애들만 앉을 수 있는데.”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우리를 보더니 덧붙였다. “아, 그래도 얘는 예쁘다. 너는 앉아도 돼.” 여기서 앉을 자격을 부여받은 ‘너’는 내 친구였고, 덩그러니 남은 사람은 나였다. 트라우마처럼 남은 기억이라기보다는, 그냥 싸늘하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 나 예쁘지 않구나.


예뻐지고 싶어서 노력했고, 그래서 예뻐졌다, 라는 전개가 펼쳐졌다면 나았을까. 예뻐지고 싶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 어떤 장점들보다 예쁘다는 것이 주는 힘이 커 보였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한번 더 기억해줄 것 같았고, 친구들이 나를 더 좋아할 것 같았고, 좋아하는 아이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 것만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고, 가장 확실하게 남들의 사랑을 보장해주는 것은 빼어난 외모라고 생각했다. 다 차치하고서라도 무엇보다 예쁜 건 그냥 예뻐서 좋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 욕망을 꼭꼭 숨겼어야 했는데, 아주 오랜 시간 ‘그런’ 데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고 혼이 났기 때문이다. 외모를 꾸미는 데 신경을 쓰는 것은 ‘머리 빈’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기 생각이 뚜렷하면 얼굴이 뛰어나게 예쁘지 않아도 사람 자체가 예쁜 아우라를 갖게 된다는 다소 그럴듯해 보이지만 무리한 위로 혹은 가르침을 받았다.


참 이상한 게, 나는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어서도, 예뻐지기 위해 노력을 해서도 안됐는데 주위에서는 나에게 예쁨‘도’ 요구했다. 설령 그 누구도 요구한 적이 없대도 그것은 나에게 명백한 요구처럼 받아들여졌고, 그 요구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은 만큼 나 역시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것을 충족시켜야만했다.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나의 성적이 떨어지자 내가 ‘망하는 줄 알고’ 본인의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며 나라는 존재 자체의 문제를 논하는 한편, 외모에 대해서는 종례 시간에 다른 아이들 앞에서 “살이 정말 많이 쪘다”고 별 대수냐는 듯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나는 '인생이 망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해야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살이 쪘다는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대수롭지 않게, 필사적이지 않게 살을 빼야 했다. 그 선생님만이 나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요구의 근원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장난스럽게 나보다 예쁜 아이들과 나보다 못생긴 아이들의 이름을 줄줄이 나열하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때때로 안도하고 때때로 섭섭해했다. 상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가면 다리가 두껍다고, 머리를 자르면 못생겼다고 누구든 쉽게 말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예쁨’은 나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지만, 부차적인 조건으로 마땅히 구비돼있어야 하는 자질이었다. 성적이나 학술적 측면이 내가 내세우고 계발해야 하는 나의 정체성이었다면, 외모는 그 뒷편의 항상 같은 자리에서 괜찮게 존재해야 하는 바탕 같은 것이었다. 외모에 관심이 많으면 비난을 받았고, 예쁘지 않으면 그냥 슬펐다. ‘외모에 관심이 없는데 예쁘다’라는 칭찬은 ‘외모에 관심이 없으면서 예뻐야 한다’라는 이상한 부담으로 바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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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시절 트위터 계정 프로필 사진

 

 

까무잡잡한 피부가 싫었고, 화려하지 않은 내 이목구비가 싫었고, 마르지 않은 내 몸이 싫었다. 그렇지만 자신감 없는 티를 내선 안됐다. 내 몸이 싫어서 힘들었지만, 힘들어한다고 혼이 났다. 나는 고민들을 꼭꼭 숨겼어야만 했다. 꾸민 티가 나면 나는 ‘꾸미는 데에나’ 신경을 쓰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 비비크림 말고 씨씨크림을 얇게 펴발랐고, 틴트보다 혈색을 돌게 하는 립밤을 발랐다. 절대 들켜서는 안됐다. 분명히 지금의 얼굴보다 예뻐지고 싶었는데, 티가 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공부할 시간이 아깝다는 명분으로 급식을 걸렀지만 사실은 살이 찔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고,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의 기숙사에서 혼자 줄넘기를 했다. 그렇지만 식단에 연연하지 않는 척 친구들과 군것질을 잔뜩 한 날이면 밤마다 화장실 변기를 잡고 목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디 드라마틱하게 예뻐지지 않아도 괜찮으니, 아무도 내가 외모에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그걸 들켰을 때 내가 느낄 수치심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게 ‘꾸안꾸’인가? 꾸민 티를 내서는 안되는 게 꾸안꾸라면, 잔인하도록 필사적인 꾸안꾸였다. 자신감 있는 사람이 내뿜는 특유의 분위기가 아름다운 것은 맞을 수 있지만, 애써 그 분위기를 내뿜어야 한다는 강압 속에 사는 사람은 괴상한 꼴이 되고야 만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아무도 나의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해도 아무도 나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그게 좋았다. 먹고 싶은 대로 먹는 삶이 몇 년 만인지 몰랐다. 입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화장하는 게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자유롭다는 점에서 행복했다. 더이상 외모를 가꾸는 사람들이 ‘머리 빈’ 사람들이 아닐 뿐더러, 누군가의 ‘머리가 비었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던 나의 학창시절이 폭력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삶은 변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된 이후의 삶은 또다른 스트레스를 낳았다. 아무리 전보다 행복해졌다 해도, 나는 여전히 예쁜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고, 사진에 찍힌 나의 통통한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내 몸의 단점들을 찾아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 내가 ‘완성된’ 어른이 되지 않은 것 같아 힘들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한층 성숙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은데, 나 혼자만 힘들어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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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빠르망>(1996)

 

 

길을 잃고야 말았다. 나는 분명히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그 욕망을 부정해왔다. 이건 외모지상주의에 동조하는 일이라며, 진짜 ‘어른’은 예쁜 것에 집착하는 것 따위에는 초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왜 나는 내 몸의 단점까지 사랑하지 못하는지, 왜 나는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자책했다. 내 몸은 사랑받기 힘든 몸인 것만 같은데, ‘네 몸을 사랑해라!’라는 외침은 나를 이중으로 힘들게 했다. 결국 수많은 내 외모의 단점들 중 하나를 시술을 통해 보완하기로 결심했고, 글쎄, 그건 뭐랄까. 인정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몸을 사랑하는 게 힘들다. 사랑하는 척하며 안간힘 쓰는 것보다, 당장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덜 힘들다.


내 몸을 결국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됐다는 행복하고 떳떳한 결말로 마무리된다면 참 좋겠지만. 그 조언 자체가 버겁다. 지금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당분간 끙끙 앓는 일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나의 단점들로, 그리고 그 단점들을 ‘고쳤다고’, ‘너무 신경쓴다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 당분간 없었으면 한다. 예뻐지고 싶다는 내 안의 욕망을 난 아직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 인생 첫 보톡스 시술은 그렇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끝났다. 5분이면 맞는 그까짓 보톡스, 뭐 대수라고 촌스럽게 이런 길고 긴 인생의 역사까지 들이대냐 싶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널따란 볼따귀까지 사랑하는 데 실패했다는 패배감에 꽤 시달렸다.


차라리 누군가 예뻐지고 싶다는 내 욕망을 조금이라도 긍정해주었다면. 너는 충분히 예쁘지만, 네가 더 예뻐지고 싶은 마음이 설령 있더라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랬다면 좀 더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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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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