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난날은 오늘을 만들고, 그렇게 삶은 영화가 되고 [영화]

글 입력 2020.03.06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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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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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Intro


 

누군가의 인생의 길게 늘여 한 시기를 자른 후 그 단면을 살펴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사람이 당장 일어나서 하루 동안 한 일과들이 물론 드러날 테고, 그날의 마구 뒤엉킨 생각들과 이따금 그를 괴롭히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모두 한꺼번에 나타날 것이다.


영화 <페인 앤 글로리>(2019)에서는 스페인 영화계의 거장, 영화감독 살바도르 말로(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일생의 한 시기를 2시간 동안 비춘다. <페인 앤 글로리>는 여전히 영화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영화를 찍을 체력적인, 정신적인 힘도 사라져버린 노년의 살바도르 감독이 겪는 이런저런 사건들과,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과거들, 그 과거들로 다시 풀어내는 현재, 그리고 그것들이 얽혀 이후의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스페인의 강렬한 색채 위에서 풀어내고 있다.


<페인 앤 글로리>는 영화의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혹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을 모르거나 그의 작품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아름답고 강렬한 색채로 가득한 세계에 잠시 빠진 채, 살바도르의 현재와 과거의 고통(pain)들을 묵묵히 바라보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광(glory)으로 변해가는 그의 일생의 한 단면을 함께하면 된다. 충분히 매력적인 여정일 것이다.

 

 


1. 스페인의 햇살을 삼킨 강렬한 색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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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 앤 글로리>는 시각적으로 아름답다. 영화가 시작된 순간, 강렬한 색채들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콜 미 바이 유어네임>(루카 구아다니노, 2018)이 지중해의 햇살 아래 몽롱하도록 부드러운 파스텔의 색들로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했다면, <페인 앤 글로리>는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을 그대로 집어삼킨 것만 같은 색들로 가득차있다. 쨍한 원색들에 까만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 같은 강렬한 색깔들에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즐겁다. 영화 시작 전부터 높은 채도의 색들이 뒤섞인 현란한 마블링으로 시선을 사로잡는가 하더니, 시작과 동시에 스크린을 꽉 채우는 짙은 푸른색은 곧바로 관객들을 압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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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가 어린 시절을 보낸 회백색의 집 구석구석을 장식하는 화려한 패브릭과 타일들, 새빨간 꽃들은 새하얀 벽들과 대비를 이루어 본연의 강렬한 색깔을 한껏 내뿜는다. 어른이 된 살바도르가 한평생을 바쳐 꾸민 집의 센스 넘치는 가구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잘 때 입는 티셔츠, 수건 한 장조차 예사롭지 않다. 타는 듯한 색깔에 빨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2. 과거는 다양한 방식으로 현재에 개입한다


 

우리는 꽤 바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옛날 생각’으로 보낸다. 그것들이 왜 떠오르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 일상 속의 뜬금없는 사물 혹은 예기치 않은 사건들로 오래 썩혀뒀던 기억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지속적으로 시달리는 기억들도 있을 것이다. 나의 오늘 하루는 꽤 많은 과거들과 합쳐져 있다. 지병과 싸우며 우울과 무기력 속에 권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살바도르 역시 마찬가지다. <페인 앤 글로리>는 현재의 살바도르와 그가 떠올리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병치시키며 보여준다. 우연찮게 소환되는 옛 기억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살바도르에 개입한다.


오래 전에 발표했던 영화 <맛>이 리마스터링되면서, 살바도르는 32년 만에 자신의 영화를 재관람한다. 다시 본 <맛>은, 그에게 새로운 감상을 낳았다. 살바도르는 당시 형편없는 연기를 보였다고 생각하여 갈등을 겪은 후 연락을 끊었던 주연 배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고, 그를 찾아간다. 알베르토에 대한 재고와 재회로부터 살바도르의 회고들, 그리고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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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억의 휴식을 가진 후 다시 마주하는 과거는, 그때와 전혀 다른 해석을 낳기도 한다. 그때 나에게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되기도 한다. 그 과거를 그저 홀로 곱씹으며 기억 속에 가둬둘 수도 있겠지만, 이따금 과거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현재를 바꿔놓기도 한다. 어긋났던 관계에 다시금 손을 내밀기도 하고, 발목 잡던 기억을 밟고 일어서기도 하고, 과거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한다.


살바도르는 그렇게 인연이 끊겼던 알베르토를 찾아가고, 몇 십 년 전의 애인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와의 쓰라린 사랑의 기억을 연극으로 올리고, 그를 고통스럽게 했던 어머니(페넬로페 크루즈)와의 관계를 인정할 수 있게 되고, 오랜 시간 포기해왔던 영화를 다시 찍을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그의 모든 과거와 현재의 변화들은 32년 만에 리마스터링 된 영화 <맛>, 모노드라마 <중독>, 새롭게 써내려가기 시작하는 시나리오 <첫 번째 열망>이라는 예술로서 탄생하게 된다.


 

 

3. 사랑, 욕망, 중독


 

과거의 고통들을 떠올리면서, 살바도르는 자신의 사랑과 욕망의 기억을 파헤친다. 그 기억들은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장면으로써 나타나지 않는다. 스크린을 채우는 타는 듯한 원색들의 배치 속에 그 기억들을 전달하는 인물들의 눈빛, 목소리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로써 전해진다. 그리고 그 기억 소환의 매개체이자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것은 바로 헤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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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는 다시 만난 <맛>의 주연배우 알베르토를 통해 헤로인을 접하고, 곧 중독으로 이어진다. 살바도르는 60년이 넘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헤로인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32년 전 알베르토가 헤로인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싫어했을 정도로 헤로인이라면 치를 떨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헤로인에 얽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데, 바로 몇십 년 전 갓 마드리드로 상경을 했을 무렵 깊은 사랑에 빠졌던 애인 페데리코가 헤로인에 중독되어 이별하게 되었던 과거다. 무너져가는 애인을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절망감과 사랑을 잃었다는 슬픔에 괴로워하던 살바도르는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이 그렇게 경멸하던 헤로인에 중독되고야 말았다.


치유될 수도, 다른 이와 나눌 수도 없는 내밀한 슬픔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페데리코와의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고 도리어 그의 입장이 된 살바도르는 꺼낼 용기조차 없었던 지난 사랑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알베르토 덕분에 그 사랑을 <중독>이라는 연극으로 만들어낸다. 살바도르의 사랑은 그렇게 살바도르 자신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을 <중독>이라는 예술로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중독>은 오래 전의 애인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영화계의 거장이 된 살바도르는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페데리코와 몇 십 년 만에 만나 과거의 기억을 들이킨다. 전력을 다해 사랑한 누군가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잃어버린 후 먼 훗날이 지나 다시 만난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들게 할까. 끝나버린 이야기에 대한 뼈저린 현실감일까,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보는 벅참일까. 혹은 그저 분명한 것은 ‘오늘 밤은 자기 글렀다’는 생각과 함께, 그를 지금 보고 싶다는 마음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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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정이 다 닳은 후 옛 연인을 바로 마주하고 “너는 여태까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채우지 못했던 내 삶을 채워주었어”하고 말하는 살바도르. 그 어떤 원망도, 그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은 채 애인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 마음을 차마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다. 그저 그의 눈빛만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다. 빠져들 수밖에 없는 눈빛이다.


헤로인 중독에서 벗어나 건강을 되찾을 의지를 보이는 살바도르. 그런 그에게 한 장의 그림이 우연찮게 전해지고, 그 그림은 아주 어릴 적 그가 처음으로 성적인 욕망을 느꼈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어린 살바도르의 달아오른 뺨과 벌름거리는 콧구멍,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부엌에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목욕 중인 에두아르도(세사르 빈센트)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 따가운 햇살이 유난히 내리쬐던 어느 날, 어린 살바도르가 처음 느낀 ‘첫 번째 열망’은 그렇게 일사병과 뒤엉킨 현기증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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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깊은 부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첫 번째 열망, 살바도르의 시작, 자기 자신으로서의 시작을 떠올린다. 모든 기억을 거슬러 가장 완전한 과거를 마주할 수 있는 살바도르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4. ‘어머니’, 그 끔찍한 무게에 대하여


 

사랑과 욕망이 살바도르의 과거를 이루는 하나의 큰 축이었다면, 그를 현재까지도 괴롭히는 두 가지 고통이 있다. 바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건강과,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 하신타와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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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단어가 가진 강력한 힘은 우리를 저절로 고개 숙이고 하고, 이따금 숙이다 못해 질식하게 한다. <페인 앤 글로리> 속 살바도르와 어머니 하신타의 관계는 진부한 ‘모성애’의 서사와 다르다. 알모도바르 감독이 그의 전작(前作)들에서 그린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헌신하면서 과도하게 군림”하는 존재였고, <페인 앤 글로리> 속 하신타 역시 비슷한 흐름으로 등장한다. ('씨네21')


살바도르에게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따뜻한 기억을 차지하고 있는 한편, 그를 평생 동안 옥죄어 온 존재이다. 오랜 세월의 이야기가 잘려 있지만,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임종을 눈앞에 둔 하신타와 살바도르의 대화는 그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하신타는 살바도르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한편, “너는 좋은 아들은 아니었어”라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존재다. 하신타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대신, 그가 자신이 바라는 아들이 됨으로써 그 희생에 보답하길 바랐다.


어머니의 희생과 아들의 보답, 그것은 하신타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살바도르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바라는 아들의 모습과 살바도르 자신은 절대 같아질 수 없었다. 살바도르는 내내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 무거운 마음 한편에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 그것을 받아들여주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살바도르의 평생을 괴롭힌다.


‘널 위해 희생했어’라는 말 앞에 살바도르는 평생 동안 자신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것은 얼마나 끔찍한 무게를 지닌 말인가. ‘희생’은 사랑의 거룩한 한 형태일 수 있지만,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기 자신의 인생을 볼모로 잡아 그에게 나의 삶의 방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기 쉽다. 미처 바라기도 전에 자신 앞에 바쳐진 희생 앞에 살바도르는 보답의 의무를 짊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의무는 자신을 위해 삶을 비워버린 어머니의 존재에 자신을 동일시해야만 하는, 자기부정의 방식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살바도르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다.


 

“엄마, 원하시는 아들이 아니었던 것 정말 죄송해요. 엄마가 하시던 말 있잖아요, ”얘가 누굴 닮았지?“ 그 말에 자랑스러움은 없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그냥 제 자신이었을 뿐인데 엄마를 실망시켰다는 걸요. 제가 정말 죄송해요."



이 모자(母子)가 서로를 끝내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뿐이다. 어머니는 ‘그저 그녀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 살바도르를 옥죌 의도가 없고, 살바도르 역시 그저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박상영, 2019: 177). 그것은 저마다 확고한 삶이고, 끝내 서로 이해될 수도, 합해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그래서 서로가 “공유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화해라고 할 수 있다면, 살바도르와 하신타는 마침내 화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5. The Powerful Play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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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페인 앤 글로리>를 완성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 살바도르가 마주한 그 모든 과거들과, 그 과거를 마주하던 최근의 살바도르 모두, 영화를 찍고 있는 살바도르의 ‘진짜 현재’로 집약되게 된다. 그는 지난날의 고통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앞으로의 나날들을 나아갈 용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영화로서 탄생시킨다. 영화 없이 살 수 없었던 살바도르는 과거의 고통들로 인해 영화를 중단해야 했지만, 다시 그 과거를 통해 삶이 영화가 되고, 영화가 삶이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일어나는 프레임의 반전은 작품의 곳곳에서 예고된 것이었다. <중독> 공연에서 스크린을 넘나드는 알베르토, 병원 대기실의 공원 같은 배경 등, 살바도르는 자꾸만 우리를 깨운다.


스페인 영화계의 거장이라는 영광을 이룩한 살바도르의 지난날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제대로 마주하는 과거의 고통은 현재의 고통을 바꿔놓을 수 있는 영광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도, 우리도 계속 아플 것이다. 앞으로의 나날들이 아플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살바도르는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멀찍이서 바라보게 해준다. 자꾸만 깨운다. 조금만 더 멀리서 보라고, 너의 삶은 영화가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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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페인 앤 글로리>에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고백한 고통과 영광에 대하여〉, 《씨네21》, 2012년 2월 12일.

박상영, 「우럭 한 점 우럭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2019, p177.

 


[장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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