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별 것 없는 책 읽기, 쾌락독서 [도서]

책 읽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글 입력 2020.02.1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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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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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는 독서에 대해 이상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만으로 무언가 한껏 고양되고 으쓱해지는 느낌에 빠져 살았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도무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지적 허세와 허영심에 말이다. 한껏 지적 허세에 도취되어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던 그 시기엔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나는 왜 그랬던 걸까…) 괜히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속으로 평가절하하고, 책을 읽는 사람만이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 수 있다는 (전혀 말도 안되는!) 생각을 은연 중에 품고 다녔다.

 

이 말도 안되는 생각을 품고 있던 내게 탁 하고 파문을 일으킨 건 예능 프로그램에서 얼핏 흘려 들었던 유인나 배우의 한 마디였다. (심지어 그 예능은 커플 주선 프로그램 ‘선다방’이었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그 사람이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남들이 만나 님들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능에서 나는 뜻밖의 자아성찰을 위한 원투 펀치를 맞았다. 멍한 기분에 한동안 그 말을 계속 곱씹다가 툭 내뱉았다.

 

“…그래. 책 읽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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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취미 생활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게임을 하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일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정확히는 그 동작을 해내는 데 있어서 느껴지는 부담감의 무게는 다를 수 있지만, 이들의 근본은 같다. 지식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든, 책을 찾든 두 행동 모두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한 활동이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SNS를 하든, 그 행동들 역시 즐거움을 얻기 위한 행동이다. 요점만 말하자면 결국,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 안 읽어도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굳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요즘엔 책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지분이 많이 줄어들어 민망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여전히 답답할 때면 서점에 가거나 책장을 넘긴다. 책과 관련된 굿즈들에 욕심을 부리고, 새로운 활자 덩어리를 사 들고 나오며 좋아한다. 큰 이유는 없다. 그냥 책이, 책과 관련된 것들이 좋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나는 이런 ‘시간 대비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기호 취미’를 놓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다 독서와 관련된 책을 폈다. 역시 책은 책으로 다스리는 법이다.


 

 

쾌락 독서? 독서 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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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새해를 맞이한 이후 독서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정확히는 스쳐가는 책은 많은데, 완독을 하거나 마음에 남길 만한 책이 많이 없었다. 어떤 책은 몇 문장이 남았고, 어떤 책은 몇 단어가 남았지만, 어떤 책들은 표지의 색상이나 제목의 한 단어만 남기고 저 멀리 떠나갔다. 독서, 그러니까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게 된 건 순전히 이 때문이었다.


어떤 책을 읽어야하나 하나 고민하다가 두 권을 뽑아 들었다. 한 권은 이동진 평론가의 『이동진 독서법』, 다른 한 권은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 이동진 평론가야 워낙에 유명한 다독가이자 작가지만, 도대체 한 사람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달고 ‘OOO 독서법’이란 책이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고, 문유석 판사의 경우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의 통통 튀는 유쾌함이 어떻게 글로 나타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이 ‘작가로서의 문유석 판사’를 알게 된 첫 책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책 다 좋았지만 『쾌락독서』 가 이겼다. 적어도 내 편파 판정 하에서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소위 말하듯 ‘현웃 터지며’ 책을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유쾌할 수밖에 없는 능청스럽고도 편안한 문체에 계속 박수를 치며 책장을 넘겼다. 지하철 쩍벌남의 다리는 손수 오므려주고, 상사의 복장 지적엔 ‘니캅’으로 응수하는 박차오름 판사를 보는 듯 시원시원한 책이었다. 책읽기는 그냥 책읽기일 뿐이라고, 즐겁고 재밌어야 책도 읽는다는 말을 수없이 해대며 웃겨주는, 만화책처럼 킬킬대며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얼마나 유명하고 대단한 책을 읽었든 지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면 최소한 현재로서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 책이다. 한 줄의 문장, 또한 한 단어가 기억에 남아 있다면 내게 그 책은 그 한 줄, 또는 한 단어다.


- p.14



한권으로 짜인 통 이야기가 아닌, 문유석 판사 자신의 독서 경험을 담은 짧은 글들을 비슷한 주제로 엮어낸 책이라 부담스럽거나 어렵지 않다. 마치 누군가의 서재를 구경하듯 한 사람의 취향으로 범벅된 책장 컬렉션을 글로 읽는 느낌이다. 자연히 ‘따라야 하는 독서의 법칙’은 없어진다. 꼭 읽어야하는 필독서나 고전, 교양이 듬뿍 담겨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는 ‘지식인’들의 글들도 읽을 필요가 없다. (물론 자신이 좋아서 읽고 싶다면 상관없다.) 만화책도, 야한 이야기도, 스포츠에 목숨 거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도 이 안에선 독서가 된다. 새삼 사람들이 ‘독서’라 부르지 않는 독서들, 그러니까 웹소설이니 만화책이니 장르물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읽는 행위들을 독서라 부르지 않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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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인 채로 응축되어서 지식을 떠먹여주는, 요약 정리본 같은 책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즐거움과 즐겁게 책을 읽는 방법에 대해선 쉴 틈 없이 조언한다. 죽은 글쓰기를 위해 정진하는 지식인들의 현학적인 노력을 유쾌하게 비웃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독서는 마음과 기억에 남지 않는다 말한다.


빈틈없이 웃기고, 틈틈이 자기 PR을 일삼으며, 독서라는 건 그냥 하는 것이라 이야기하면서도, 진지해질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다. 판사라는 직업이 주는 기대감을 적절히 채워주듯, 정의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본 사람으로서 젊은 날에 대한 여유로운 성찰을 보인다. 짧은 글들임에도 기승전결이 뚜렷해서 책 안의 모든 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서라는 행위에 대해 사회가 부여하는 중압감을,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품고 있는 부담감을, 살포시 내려놓아도 된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보여준다. 독서에 대한 문제를 독서로 해결하는 셈이다.

 


독서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세상에 쉬운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독서란 정처 없이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행위지 누군가에 의해 목적지로 끌려가는 행위가 아니다.


- p.132

 


글이란 쓰는 이의 내면을 스쳐가는 그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공감받을 만한 조각들의 모음이다. 나는 그래서 책이 좋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커피 두 잔 값으로 타인의 삶 중에서 가장 빛나는 조각들을 엿보는 것이다. 그것도 쓴 사람 본인이 열심히 고르고 고른.


- p.183


 

책은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글은 모든 것을 담고 있지 않다. 삶과 세상은 언제나 책과 글보다 크다. 그러니 책읽기는 별 게 아니다. 글쓰기도 별 게 아니다. 그저 누군가의 생각을 조금 더 논리적인 형태로 읽어내고, 내 생각을 정제된 형태로 표현하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책읽기를 부담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앞서 말했듯이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다만 책을 읽는 이유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다는 점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과 독서는 닮아 있다. 오히려 독서는 답이라 생각하던 것에 의문을 던져 길을 잃게 만든다. 독자는 그 과정에서 스스로 답을 일궈 나간다. 인생을 작은 버전으로 미리 살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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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 이 간접 경험이 그리 거창하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냥 이야기에 빠져서 평소의 나와 다른 내가 되기만 하면 충분하다. 이건 꼭 책이 아니라도 영화가, 드라마가, 웹툰이, 심지어 예능조차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책은 그 정보의 주도권을 독자에게 준다.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해석할 시간을, 독자가 채워 넣어야 할 공백을 충분히 주면서 말이다. 활자 간 여백의 공간들이, 책을 읽다 멈추는 그 잠깐의 시간들이 사이 사이에 생각이 녹아들기에 책을 통한 우리의 경험이 조금 더 풍부해질 뿐이다.

 

그러니 책읽기는 별게 없다. 심지어 읽고 나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도 상관없다. 읽는 시간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드라마나 예능을 볼 때 엄청난 지적 성장이나 혁신적인 깨달음을 얻으려고 보지는 않듯 (물론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을 건네 주는 작품들이 존재하긴 한다) 책도 마찬가지다. 우선 즐거우면 충분하다. 그러니 무언가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억지로 읽고 싶지 않은 책을 꾸역꾸역 읽어내는 일, 그래서 독서를 더 부담스럽게 여기는 일은 ‘굳이’ 지속할 필요는 없다.

 


지나고 보면 바로 이 멈추었던 순간들이 독서 경험의 핵심이다. 수도적으로 내 감각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고 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 것이 된다.


- p.175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이 아닌가.


- p.259

 

 

*


즐거움을 쫓으며 책을 읽는 ‘쾌락 독서’, 

 

그리고 그 덕에 얻어지는 ‘독서 쾌락’. 

 

이 두 가지가 책을 읽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이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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