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당신의 성별은 무엇인가요?, 연극 "후회하는 자들"

연극 <후회하는 자들>로 보는 젠더 담론
글 입력 2019.12.14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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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후회하는 자들>은 MTF 성전환 수술을 했던 인물 올란도와 미카엘의 이야기이다. 두 인물 모두 실존 인물이며, 이 연극은 두 인물이 출연한 토크쇼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재구성한 것이다. 연극도 원작의 다큐멘터리와 동일하게 토크쇼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로지 대사와 몇 가지 사진으로만 진행되는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잘 다루지 않는 독특한 소재와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해 몰입도가 매우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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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 이은경)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올란도와 미카엘은 모두 자신이 성전환 수술을 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는 인물들이다. 미카엘은 1994년 50살의 늦은 나이에 성전환 수술을 했지만, 현재 재수술을 계획 중에 있으며, 올란도는 1967년에 스웨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여성의 삶을 살다가 다시 재수술해 현재 남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해서 젠더 문제에 대해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두 인물의 대화는 단순히 트랜스젠더로서의 경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더 나아가 한 개인의 정체성과 그것에 대한 세상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까지 확장된다. 본 리뷰에서는 연극 <후회하는 자들>을 통해 트랜스젠더 담론과, 성별 이분법 그리고 젠더 퀴어 등 다양한 담론에 대해 다뤄보려 한다.

 

*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 정체성이 같은 사람들을 시스 젠더라고 칭하고, 다른 사람들을 트랜스젠더라고 칭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트랜스젠더와 동성애를 헷갈리곤 하는데, 동성애는 한 사람의 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동성에 대한 지속적이고 자연스러운 애정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적 지향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트랜스젠더 중 자신의 생물학적 성 기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 고통을 초래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성전환 수술을 택한 사람을 트랜스 섹슈얼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올란도와 미카엘 모두 이런 의미에서 트랜스 섹슈얼이지만 그들이 성전환 수술을 택한 이유는 서로 다르다.


 

[후회하는 자들] 올란도(김용준 분) 과거 사진.jpg

올란도 과거 사진



올란도는 성전환 수술을 한 이유를 ‘배가 고파서’라고 설명했다. 위탁가정에서 자란 올란도는 집을 나와 공원에서 동성 매춘을 한다. 그러다 덴마크의 첫 성 전환자 크리스틴 요한슨의 삶을 잡지에서 접하고 그 삶을 동경하게 된다. 그는 크리스틴 요한슨처럼 예쁘게 변하여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살고 남편에게 사랑받는 삶을 원했고, 수술을 자행하여 이사도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후회하는 자들] 미카엘(지춘성 분) 과거사진.jpg

미카엘 과거사진

 


올란도는 남성일 때든, 여성일 때이든 자존감은 높은 편이었으나, 미카엘은 그렇지 못했다. 미카엘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적 기준으로서의 ‘남성성’과 거리가 멀어 외적인 모습과 행동으로 인해 놀림을 많이 받아왔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는 낮은 자존감은 우연히 여장남자 모임(크로스 드레서)에서 채워지게 된다. 처음으로 칭찬을 받은 올란도는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새로운 몸과 정체성으로 새로이 시작하고 싶어 했고 수술을 통해 미카엘라로서의 삶을 택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이 참으로 보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란도와 미카엘이 생각하는 여성은 모두 사랑을 받는 수동적인 여성상이었다. ‘예쁜’ 모습으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너무나도 전통적인 여성상에 갇혀 있었다. 트랜스젠더의 삶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그들의 삶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런 만들어진 여성상을 꿈꾸고 여성의 삶을 택한 올란도와 미카엘이 후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트렌스젠더들의 삶이 그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올란도와 미카엘의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진짜 여성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처음 수술을 했을 때 과하게 치장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화장을 매우 두껍게 하고,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가발을 쓰고, 구두는 무조건 하이힐을 신으며 옷은 하늘하늘 레이스를 입는 등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치장을 다 했다고 한다. 그리곤 ‘막상 여자들은 그렇게 안 하는데’라고 덧붙인다.

 

시스 젠더이든, 젠더 퀴어이든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올란도와 미카엘처럼 mtf 트랜스젠더들이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성별 이분법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인물들인데, 가장 그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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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 이은경)

 


놀랍게도 트랜스젠더는 시스 젠더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젠더 정체성 역시 젠더 이분법에 의해 형성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젠더 이분법이 아직도 아주 유효한 사회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여성성’과 ‘남성성’을 체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트랜스젠더는 시스 젠더와 달리 자신의 성별을 타인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외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오히려 젠더와 된 신체표현을 더욱 과장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정체화 한 젠더의 모습으로 보이게 위해 사회 문화적 코드를 내면화하게 되고 젠더 이분법을 재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젠더 이분법은 여성과 남성 그리고 트랜스젠더 모두에게 억압이다. 올란도와 미카엘은 여성의 삶을 직접 겪어봤기에 입을 모아 여성의 지위는 분명히 남성보다 하위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여성성’이라는 것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인 공격성, 경쟁성, 지배성 등으로 놓고 그 반대의 취약한 것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여성성’은 ‘남성성’보다 하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수동성, 유약함, 순종성 등으로 정의된 여성은 가부장적 권력을 내면화하게 되고 그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젠더 이분법은 남성에게도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남성성’을 이행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놓은 영웅화된 남성상에 편입할 수 있기에 대놓고 억압을 받는 여성보다는 나은 실정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남성의 인간적 삶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남성성’도 결국엔 이데올로기가 만든 허상이기에 그 특성들은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난 모든 개인들을 설명할 수 없다. 미카엘이 성격이 거칠지 않다는 이유로 학창시절부터 ‘여자 같다’ 혹은 ‘게이 같다’라는 놀림을 당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카엘의 ‘여자 같은 ‘행동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위협하기에 '미카엘'이라는 개인을 지우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결국 ‘폐쇄적이고 콤플렉스 덩어리인’ 미카엘을 만들게 되었다.

 

앞서 트랜스젠더는 자신이 정체화 한 젠더의 모습으로 보이게 위해 사회 문화적 코드를 내면화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이들이 미카엘과 올란도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과도하게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도 결국엔 젠더 이분법으로 인한 억압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은 성소수자이기에 이중의 억압을 받게 된다. 아직 많은 사회에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억압 그리고 차별이 존재한다. 이들은 시스 젠더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젠더 이분법을 벗어난 일탈자들이기 때문에 최대한 젠더 이분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젠더 이분법이라는 이 견고한 이데올로기 아래서 모두가 피해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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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 이은경)

 


이분법은 간편하지만 폭력적이다. 이런 분류와 구분은 매우 교묘하게 개인에게 작동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이것이 폭력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도 물론이거니와, 올란도와 미카엘의 대화는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정상’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며 울분을 터뜨린다. ‘정상’의 사전적 의미는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이다.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개인은 누구든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범주로 나뉘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들은 모두 그들 자체로 ‘탈이 없이 제대로인 상태’이기에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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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버틀러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의 저서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 수행성’에 대해서 주장한다. 젠더 수행성이란 성적 정체성은 반복적인 수행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는 개념이다. 이는 니체가 ‘행위만이 전부이다’라고 했던 주장을 발전하여 접목한 이론으로 버틀러는 ‘행위만이 있을 뿐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즉, 특정한 젠더를 가졌기 때문에 그 젠더의 행동 양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행동을 수행하기 때문에 어떠한 젠더라고 ‘호명’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호명되는 정체성은 수행하는 행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한 개인의 정체성은 “재의미화될 수도 있고 재발화”될 수 있다. 그렇기에 젠더란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젠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에 따라 수많은 정체성이 있는 것이다. 올란도와 미카엘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어떤 말들은 아예 사용을 금지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비정상을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정상을 없애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이론을 따른다면 남성 중심적 헤테로 섹슈얼이라는 담론을 뛰어넘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

 

언젠가 여성학 강의를 들었을 때, 첫 시간에 교수님께서 “이 강의실에 몇 개의 성별이 존재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신 적이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이 강의실에 앉아있는 사람 수만큼 존재한다”였다. 언젠가 미래에는 올란도와 미카엘의 말처럼 그들이 삶에 접근했던 방식이 정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날이 오길.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분류가 해체되어 모두가 자신이 구성한 온전한 정체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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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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