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미스홍, 그림으로 자기를 찾아가다

그림을 매개로 나와 가까워지기
글 입력 2019.07.18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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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 10년쯤 되면 나를 위해 흐르지 않는 시간의 건조함을 느끼며


'나는 누구인가?','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내가 지금 잘 사는 게 맞나?'같은 질문들과 만나게 된다. 때가 되면 누구나 이 질문들 앞에 서야 하는 순간이 된다. 그런 이유로 30대 여성 '홍'이 찾아왔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미스 홍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며 그림, 책의 문을 연다. 이 책은 홍이 작가인 김에게 그림을 배워가며 자신의 내면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홍의 시선에 따라, 홍과 김의 대화에 따라 글이 전개된다. 나를 위해 맞춤 제작한 책 같았다. 공교롭게도 내 성은 홍이였다. 운이 좋게 작가가 나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해주는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선이라는 것은 내가 연필을 통해 스케치북을 만날 때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사람마다 다른 선을 갖고 있고 '남과 다른 나만의 선'은 현대미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 p.13



이런 이유로 책의 초반 부분엔 낙서하기, 가로선 긋기, 세로선 긋기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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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선 긋기



여태까지 나에게 선 긋기란 삐뚤빼뚤 줄긋기의 반복이었을뿐더러 마음에 안 잡히는 것이었다. 다른 드로잉 책들을 볼 때도 제일 첫 장에 나오는 선 긋기는 패스하기 일쑤였다. 저 방법대로 하니 신기하게도 몰입해서 잘 그어졌다. 끝나는 점을 알고 있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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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을 알고 그은 가로선



난 항상 끝이 어딜까 불안해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끝을 알고 시작하는 선은 참 편했다. 끝을 알고 있으니 비틀거리면서 시작했어도 끝은 올 곧았다.



그렇지. 세상의 모든 예술가를 다 알아야 한다면 분명히 힘든 일이야. 하지만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미가 달라지겠지.


- p.41



옛날에,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국어를 가장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작품을 볼 때 작가의 생애와 가정환경, 시대적 배경, 심지어 누구의 제자였는지 따위 등을 알아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왜지? 작품만 해석하면 되지, 왜 그 사람뿐만 아니라 시대까지 알아야 돼?' 이제는 알고 있다. 작품은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 만든다 하더라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들은 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며 사람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에도 저것에도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것들에도 쉽게 영향을 받고 영감을 받는다. 내가 상대를 좋게 보는 것은 내가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사람의 어떤 모습에서 보는 것이고, 따라서 상대를 알아가는 것은 내가 어떤 것을 궁금해하고 어떤 것을 미덕이라고 혹은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예술을 알아가는 과정은 예술가의 어떤 경험이 나랑 비슷한지, 내가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아직까지 좋아하는 예술가를 찾지 못했다.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이상한 고집이 있는데, 관심이 있는 예술가는 앙리 마티스, 반 고흐다.



나뭇잎을 그린다는 것은 나뭇잎을 만나는 것이고, 만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존중하는 거지. 그래서 나뭇잎에 잎맥의 순서를 생각하면서 선을 긋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뭇잎과 친해지고 그 생명이 살아가는 방식을 드러내게 되지.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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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튤립



튤립을 그리면서, 줄기와 가까운 부분은 연한 녹색을 띤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사실을 존중하면서 색을 사용했다. 그리고 모난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편안함을 느꼈다. 그랬더니 그림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나왔다. 그림은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에 납득할 수 있었다.


*


이 밖에 구도와 공간에 대해서, 설치미술, 행위예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행위예술 이후 맺음말 없이 책이 끝나버려서 서둘러 끝마쳐버리는 느낌이라 당황했다. 그래도 그만큼 흡입력 있게 읽고 따라가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아쉽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책에서 본 바에 따르면 현대미술은 내가 보는 세상이다. 현대미술가들은 세상을 중심에 두지 않고 나를 중심에 둔다. 내가 중심이 되면 '나는 어떻게 세상이 원하는 데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내가 나의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내가 사는 세상'이 실재하는 세상보다 나에게 더 가치 있다는 태도가 생기면 현대미술가가 왜 저렇게 색다른 방법으로 작품을 해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나는 말하자면 전자에 가깝다. 보여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 민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그림을 잘 그려서 교내의 상이란 상은 다 휩쓸던 친구였다. 그와 별개로 나도 그림을 좋아했다. 그러나 민경이처럼 상을 휩쓸지는 못했다. 민경이처럼 그리고 싶어 민경이가 다니는 학원에 갔다. 당연히 학원에 한두 번 갔다고 학원을 오래 다닌 민경이처럼 그릴 수는 없는 건데 그때 나는 엄마가 학원에 처음 상담 갔을 때 우리 애가 민경이만큼 그림을 잘 그린다고 선생님에게 말했던 게 다 허풍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들킨 것 같아 너무 창피해서 한 달도 채 다니지 않은 학원을 엉엉 울며 관둔다고 했다.


그러고 나선 그림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민경이만큼 못 그린다는 이유로. 그 뒤로는 그림을 안 그렸다. 다시 그림을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15년이 걸렸다. 성인이 된 나는 알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마음뿐만 아니라 내 시간, 내 돈, 내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을. 잘하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또 잘한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솔직하게 내가 느끼는 그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나만의 속도로 많이 그려보려 한다. 그림으로 나를 드러낸다는 사실에 많이 부끄러울 것 같지만 부끄러운 것들을 마주해 잘 그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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