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간이라는 감각 [기타]

글 입력 2019.04.27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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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는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로 나누어 보았다. 크로노스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어떤 결정적 시각을 의미한다.

요즘 나의 시간은 크로노스를 따른다.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는 하루는 시간이나 분 단위로 지각되지 않는다. 잠에든 상태에서 의식이 돌아오면 꿈의 형상들이 다가온다. 그들과 어울리다가 곧 눈을 뜬다.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고 다시 눈을 감을 때 끝이 난다.

블랙홀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4시간이라는 약속이 극히 느리게 흘러 바깥은 나를 동일하게 본다. 나는 계속 달리지만 오늘의 끝은 조용히 유예된다. 길에는 이정표가 없어 어디쯤 왔는지 언제까지 가야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가 생각났다. 분명 남들보다 여유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그뿐이다. 양적인 시간은 질적인 시간을 덮지 못했다. 시간에도 향기가 있다면 나의 시간은 옅은 알코올일 것이다.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은 시작도 끝도 없이
공허한 지속으로 늘어진 시간이다.
공허한 지속은 텅 빈 행위의 시간 형식이다.
조급한 불면의 밤”

휴식은 지속이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1막과 2막 사이의 인터미션은 앞뒤로 공연이 있기 때문에 휴식시간이 될 수 있다. 공연이 없는 인터미션은 그저 수량적으로 20분일뿐이다. 나의 공연은 1막은 있었으나 2막이 열리지 않고 있다. 관객들이 이상함을 눈치 채고 웅성거리지만 무대는 조용하다.

어쩌면 공연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텅 빈 행위, 텅 빈 무대라는 형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누구도 모르고 있을 뿐.

“중력 없는 시간이 가속화를 만든다.
가속화는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의 중력에서 벗어나기를 꿈꾸지만 중력이 없다면 끝없이 가벼워진 몸은 지구 밖으로 떠날 뿐이다. 직장인의 중력은 월급날-대략 25일-에 붙잡히고 그날을 중심으로 한 달이 흘러간다.

어떤 주부의 중력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자녀의 퇴원 시간인 3시에 있고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의 중력은 그 해의 수능일자에 있을 것이다. 설사 잠깐 해방되더라도, 떠오르는 몸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새로운 중력을 만들어내고 이에 기꺼이 잡힌다.

*

시간의 감각이 기억의 지속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과학적 실험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몸소 느낀 바에 따르자면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시간만큼, 내가 된다. ‘나’를 동일한 나로 유지하게 해주는 요소 중 기억은 핵심이다. 이전의 기억이 없으면 어떤 설명을 들어도 ‘나’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시간 감각이 길다면 과거의 나부터 상상하는 미래의 나까지 시간선이 이어지고 그것을 통틀어서 ‘나’로 느낀다. 시간 감각이 짧다면 미래를 상상하기 어렵고 과거를 돌이키기 힘들다. 점점 좁아진 ‘나’는 오늘에 수렴한다.

차이가 있기에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 차이의 부재는 시간 감각을 혼동시키고 오늘을 연장한다. 변화 없는 오늘의 나는 하나의 풍경화가 아닐까. 오래된 유화마냥 찬란했던 것들이 퇴색하고 붙잡아놓았던 형체에 균열이 인다. 덧칠이나 보수도 없이 방치된 그림은 이윽고 부서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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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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