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컨택트> : SF영화에 언어를 담다 [영화]

글 입력 2019.02.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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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어느 날 미국, 러시아,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12곳에 떨어진 비행선에서 시작되는 영화 <컨택트>. 전형적인 SF 영화의 시작이다. 다음에 이어질 스토리를 예상해보자면, 지구를 침공한 기괴한 모습의 외계 생명체와 맞서 싸우는 인간들의 사투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컨택트>의 스토리는 이 예상에서 벗어나 외계 생물체와의 ‘소통’에 초점을 둔다. 다른 SF 영화들에서 잘 다뤄지지 않던 부분이다.

 

많은 SF 영화에서 외계 생물체와 인간의 의사소통은 꽤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외계 생물체가 기특하게도 영어를 할 줄 안다던가, 첨단기기를 통해 서로의 언어를 번역한다. 이도 아니라면, 외계 생명체가 건물을 부수고 사람을 공격하며 지구에 온 목적을 행동으로 보여주니 굳이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컨택트>에서는 외계 생물체가 영어를 잘하지도, 기기로 서로의 언어가 해석되지도 않는다. 물론 지구를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니지도 않는다. 어느 날 달걀 모양의 거대한 쉘(비행선)이 지구에 나타나서는, 18시간마다 쉘의 문을 열기만 할 뿐이다. 이쯤 되니 사람들은 당연히 이것이 궁금해진다.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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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금증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이다. 언어학자인 루이스는 외계 생물의 언어를 해석하고 그를 통해 지구에 온 목적을 밝히기 위해 쉘 안으로 들어간다. 두려움을 안고 마주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 “human!" 루이스는 헵타포드에게 외치지만 인간의 음성언어로는 헵타포드와 좀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다. 방법을 바꾸어 루이스는 화이트보드에 단어를 적어 소통을 시도하고 이에 헵타포드가 반응한다. 헵타포드는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듯이 허공에 자신들의 문자를 그려낸다. 이렇게 이들의 소통은 시작된다.

 

루이스가 헵타포드와 소통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질문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YOU'는 특정 개인을 지칭하거나 혹은 집합명사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할 때 서로 간의 의사소통에서 오해를 부를 수 있다. 하물며 난생처음 보는 외계 생물과의 대화에서는 더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루이스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헵타포드에게 영어를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그도 헵타포드 언어를 접하고 점차 흡수하게 된다.




헵타포드 언어&사이퍼-워프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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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매력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은 헵타포드 언어이다. 이들의 언어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우선 헵타포드가 문자를 전달하는 방식이 꽤 독특하다. 헵타포드는 인간처럼 연필과 같은 도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문자를 그려낸다. 앞서 말했듯,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는 것 같은 모습인데, 이 모습이 굉장히 신비롭다. 게다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문자의 모양은 신비감을 더욱 가중한다.

 

헵타포드 언어는 이렇게 시각적으로 눈길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색다른 성질로 흥미를 자극한다. 우선 헵타포드 언어는 ‘표의문자’이다. 대표적 표의문자인 한자와 같이 헵타포드 언어는 그 자체가 일정한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시제가 없다. 마지막은 가장 눈에 띄는 성질인데, 비선형 철자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헵타포드의 문자는 원형의 형태를 띠며 시작과 끝이 없다. 인간의 문자에서는 보기 힘든 생경한 성질이다. 덕분에 이해가 어려우니 예를 들어보자. ‘나는 밥을 먹는다’ 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인간의 언어는 ‘나’라는 단어로 시작하여 ‘먹는다’라는 단어로 끝을 맺어야 한다. 하지만 헵타포드 문자는 둥글기 때문에 꼭 ‘나’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헵타포드 언어의 역할은 단순히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사피어-워프 가설’과 만나 영화의 중요한 축이 된다. 사피어-워프 가설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역시 예를 들어보자. 이누이트어에서는 눈(snow)을 ‘내리는 눈(falling snow), 바람에 휩쓸려온 눈(wind-driven snow), 녹기 시작한 눈(slushy snow), 땅 위에 있는 눈(snow on the ground), 단단하게 뭉쳐진 눈(hard-packed snow)’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한다. 이렇게 이누이트족은 눈을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한다. 반면 이누이트어와 다르게 영어에서는 '눈(snow)'이라는 한 가지 표현밖에 없다. 같은 눈을 보더라도 이누이트족에게는 녹기 시작한 눈(slushy snow)이지만, 영어 사용자에게는 눈(snow)이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물,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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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규정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언어를 습득하면 그 언어에 따라 사고체계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컨택트>는 이것을 전제로 영화를 끌고 나간다. 루이스는 헵타포드 언어와 접촉하면서 환상을 보게 된다. 주로 그의 딸 ‘한나’에 관한 환상인데, 영화 중간마다 등장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 영상들이 루이스의 ‘환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데, 영화의 현재 시점에서 루이스에게 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영화의 끝에서 이 환상이 그의 미래에 대한 기억이었음을 루이스와 함께 깨닫게 된다. 루이스는 헵타포드 언어를 습득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헵타포드 언어의 습득이 미래를 보는 것으로 이어진 이유는 헵타포드 언어의 특징에 있다. 앞서 말했듯, 헵타포드의 언어에는 시제가 없으며 비선형 철자법의 형태를 취한다. 헵타포드 언어에서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 개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어가 시제 구분을 뚜렷하게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런 헵타포드 언어의 특징은 사피어-워프 가설에 따라 언어 사용자의 사고에도 영향을 준다. 헵타포드 언어 사용자는 세계를 볼 때 시간과 그 순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반드시 과거가 현재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현재에 머무르지만, 미래의 시간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인간은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흐른다고 인식한다. 인간이 보는 세계에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일정한 시간의 방향이 존재한다.




미래를 보게 된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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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보게 된 루이스는 미래의 기억을 이용하여 외계 생명체로 인해 전쟁 직전까지 갔던 전 세계를 화합한다. 이로써 헵타포드가 지구에 왔던 목적도 달성된다.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지구를 다시 화합하고 소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헵타포드가 본 미래에서 3000년 후에 자신들 또한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렇게 좋게만 끝나면 좋겠지만, 루이스는 미래를 보게 되며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사실까지 알게 된다. 그것은 훗날 그의 딸 한나가 희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그런 미래를 기쁘게 맞이하기로 한다. 미래의 그의 남편은 이런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겠지만 말이다.

 

끝이 마냥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하나의 이유는 그가 본 한나와 함께한 행복한 순간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일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헵타포드 언어를 배운 그에게 끝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나가 태어나기 전부터 루이스가 한나를 기억하고 있던 것처럼 한나가 떠난 후에도 한나에 대한 기억은 그와 함께할 테니까.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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