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부끄러움을 마주하다 - 썬샤인의 전사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을 보고
글 입력 2018.12.23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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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마주하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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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윤현민 / 출처: 극단 달나라동백꽃


흔히들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탄다'라고 말한다. 놀이기구 롤러코스터도 무섭지만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건 더 무섭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서 안정감 있게 균형을 잡는 일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하의 세계는 너무 두려운 곳이다. 공포, 절망, 좌절, 설움, 슬픔, 죄책감. 그런 깊고 어두운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허우적대다 정신을 잃을까 겁이 난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뒤흔드는 모든 것들을 피해왔다.

그런 내가 이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을 보러 가기로 결심하게 된 데에는 약간의 '오해'가 한 몫 했다. 작품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본 뒤 난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상상했던 것이다. 지지 않는, 끝까지 맞서 싸우며 희망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민중의 모습 말이다. 하지만 연극이 시작하고 몇 분 뒤 깨달았다. 등장인물들이 '똑'  소리를 내며 일제히 무대 위에 등장하는 순간, 우리가 잊고 있던 얼굴들이 조명 아래 드러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건 절대 밝을 수 없다고. 괜찮을 수 없다고. 긍정적일 수 없다고.

나는 무참히 흔들렸다. 해까닥 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피가 거꾸로 솟고 마음이 요동쳤다. 평정심을 잃고 균형감각을 잃고 난 그렇게, 저 아래로 떨어졌다. 선호가, 호룡이, 봄이가 내 등을 떠밀었다. 봐야 할 것을 보라고. 들어야 할 이야기를 들으라고.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기억하라고. 생각하라고. 변화는 그렇게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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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윤현민 / 출처: 극단 달나라동백꽃


연극을 보며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은 연기도, 연출도, 음악도 아니었다. 그 모든 훌륭한 것들을 뛰어넘는 완벽한 각본. 마치 거장의 대하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극은 1940년대부터 2020년까지 시대를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엮어가는 '수첩'이라는 소재. 수첩에 담긴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정교하여,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또한 '소설가'라는 주인공의 직업에 걸맞게 극 중 인물들의 대사 및 독백은 당장 소설로 엮여서 출판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아팠다. 시(詩)처럼 아름다운 대사와, 대하소설 같은 압도적인 서사. 이토록 각본이 빛이 났던 연극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적어도 내가 봐온 연극 중에서는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작가 한승우의 소설을 통해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제주 4.3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소년병 선호, 제주도 동굴 속 잠든 어린 해녀 명이, 상자에 갇혀 내일을 기다리는 전쟁 고아 순이, 화가를 꿈꾸던 조선족 중공군 호룡, 만주 위안소의 식모 막이, 인민군 군의관 시자, 여공에서 시인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춘.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얼굴을 하고 있다. 작은 콩고물을 나눠 먹으며 즐거워하고, 가족을 미워하기도 하며, 원대한 꿈도 꾸고, 남몰래 짝사랑을 하며 속앓이도 한다. 미래와 꿈과 고민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행복한 얼굴이 조명 아래 환히 빛날 때면, 뒤이어 무섭도록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마치 그들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는 듯, 웃을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비극은 그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낫을 드리운다.

긴 역사 속 되풀이되는 비극. 그 모습은 마치 체스판 혹은 바둑판 같은 게임처럼 보였다.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모두 체스판 위의 말들이다. 정작 비극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곳에 없다. 판을 짠 사람은 저 높은 곳에서 게임판을 내려다볼 뿐이다. 손가락 하나로 지시하고 명령하면서. 그리고 그의 손끝 하나에 수 백 명이 수천 명이 울부짖고 고통으로 삶이 내몰린다. 가족을 잃고 집고 잃고 인간성을 잃고 삶을 잃는다. 그 누구도 편히 잠들지 못한다. 비극이 휩쓸고 간 자리, 그 뒤에 남겨진 삶은 온통 폐허다.

그리고 상상했다. 국가가 없고, 이념의 대립이 없고, 전쟁이 없고, 욕심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화롭고 싶어 하며, 서로 미워하지 않는 세계. 마치 존 레논의 'imagine' 속 가사처럼 그런 세계라면 어떨까 상상했다. 그곳에선 순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막이는 헤엄칠 수 있으며, 호룡은 그림을 그리고, 선호는 소설을 완성했을 테다. 나는 이 연극을 보지 않았을 테고, 이 연극은 만들어질 이유도 없었을 거다. 그런 세계를 상상했다. 누구도 아프지 않은 그곳.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소년이 온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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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윤현민 / 출처: 극단 달나라동백꽃


<썬샤인의 전사들>이라는 제목은 극 중 작가 한승우의 딸 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제목이다. 만화 속 악당은 거울을 보면 불에 타 죽는다. 왜 거울을 보면 죽어버릴까? 거울에 비친 건 겨우 자기 자신의 얼굴뿐인데. 왜 그는 죽어버린 걸까. 그것도 불에 타서 활활 고통스럽게. 그 힌트는 극 2부에 대길이 낭송하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서 찾을 수 있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윤동주)



그 답은 '부끄러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극 속에 나오는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 명이의 죽음이 제주도 4.3사건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검색을 통해 깨달은 나. 무지한 나. 근현대사에서 빵점에 가까운 점수를 맞고도 웃어재꼈던 열아홉 살의 나. 그러면서도 연극을 보며 훌쩍이던 나.  연극을 보면서도,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그리고 리뷰를 적는 지금도 '부끄러움'이 나를 뒤덮는다. 그저 '아팠던 역사' 정도로만 기억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렇게 퉁치듯 포장해선 안 되는 거였다. 누가 그들을 그렇게 아프게 했는지, 그들은 무얼 위해 그렇게 울부짖었는지, 무엇을 바랐었는지.


과거의 비극, 그 자체보다도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이 계속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잘못한 사람이 벌을 받지 않고, 죄지은 사람이 죗값을 물지 않는 사회. 누구도 그것을 시정하고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회. 자신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바빠 타인의 고통, 과거의 아픔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 잘못을 고발하고 문제를 일삼는 사람들을 우리는 '프로불편러'라고 부르며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우익 기업을 불매하는 일,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다는 일, 부당함을 호소하는 청원글에 서명하는 일. 내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나 하나가 먼저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의 외침은 또다시 묻힐 테다. 그들의 얼굴은 또다시 잊힐 테다. 막이가 그랬듯, 호룡이 그랬든, 시춘이 그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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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윤현민 / 출처: 극단 달나라동백꽃


이 연극을 본 뒤, 난 균형을 잃고 아래로 처박혔지만, 다시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양팔을 넓게 벌려 조심조심 내딛던 평균대 위는 오직 내가 내디딜 한 걸음만을 시야에 담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다. 내 옆의 외침들, 아픔들은 들을 수 없는 좁고 이기적인 공간. 그곳에서 떨어진 지금, 내가 있던 곳을 다시 올려다보니 어처구니 없이 초라하고 천박하다. 몇 주 전 시작한 한국사 공부, 며칠 전 읽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 연극 관람 전 다녀온 <존 레논 展>, 그리고 이 <썬샤인의 전사들>은 모두 나에게 한곳을 보도록 가리켰다.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지시했다. 공부하라고. 편안해지지 말라고. 더 많이 불편해지고 더 많이 예민해지라고.


집에 가는 길에는 김윤아의 <강>을 들었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쓴 곡이라고 했다. 너의 이름 노래가 되어서 가슴 안에 강처럼 흐르네. 너의 이름을 부르며 강은 흐르네. 노래를 들으며 지하철역에 내렸을 땐 늘 보이던 현수막과 사람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란 리본을 나눠주며 서명을 부탁하던 사람들. 그리고 그 주변에 앉아 난동을 피우며 철거를 주장하던 사람들. 진짜 잘못한 사람은 여기 없는데. 그때 서명을 했어야 했는데. 잠깐만 발걸음을 멈추면 됐었는데. 급한 것도 없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며 집에 갔다. 강은 흐르고 있다. 부디 그 강에 비친 얼굴이 부끄럽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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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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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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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하는스누피
    • 잘 읽고 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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