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레이폴(Pray for)] 4. for Harmony [영화]

'우정의 조건(Handsome Devil, 2016)'
글 입력 2017.11.29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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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의 조건(Handsome Devil, 2016)'_존 버틀러 作


  대부분의 명사는 그것과 명확히 상응하는 동사를 가진다. ‘믿음’은 신뢰하다, ‘희망’은 바라다, ‘사랑’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좋아한다, 로 치환이 가능하다. 이 공식을 따를 때 우정은 친하다 혹은 가깝다, 라고 읽힌다. 관계 형성에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과정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대화의 물꼬를 트고 경계를 거두어들인 후에야 여러 마음이 피어날 공간이 생긴다. 곧 우정은 감정의 선행이다.

  우정은 가벼이 느껴진다. 어렵지 않게 형성되고, 다른 감정들에 묻히기에 우리는 우정을 함부로 대한다. 시작이 아닌 준비 단계이자, 깊지 못한 감정으로 인식된다. 부담이 없기에 진전된 감정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때로 우정을 명목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애매하게 책정된 우정의 범주는 관계를 가로막는 족쇄가 된다. 무엇보다도 견고하면서 너무도 사소하게 깨지는 것이, 실은 단단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우정의 벽이다.

  우정이 단순히 가까움의 영역이라면 그 거리는 어떻게 지속될까. 시간에 악력에 맥없이 벌어지지 않고 붙박여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무의미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남아, 이제는 기초가 아닌 목적으로서의 우정을 만드는 힘. 이것을 우정의 조건으로 보자. 모든 만남에 이 벽이 쌓일 수 없는 법, 힘은 부분적으로 발현된다. 벽돌을 쌓아 올려 무너지지 않도록 다지게 하는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우정은 어떤 사람,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 깊어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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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럭비는 일종에 전투에 가깝다. 주어진 공을 수 명의 장정을 헤치고 상대방의 진영에 놓아야 한다. 득점하기 위해 혹은 막기 위해 붙잡고 넘어뜨리는 몸싸움이 허용된다. 손과 발 모두를 이용하여 상대를 저지하고 공을 지켜낸다. 이기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에만 집중해야 한다. 타인에게 눈을 돌리는 순간, 그 아픔과 두려움을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붉은 천을 향하는 소처럼 그들은 오로지 저돌만을 목표로 한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건 상대와 공감하거나 감정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폐쇄성과 공격성은 오히려 인력을 가지고 사람을 그러모은다. 사회 운동이 빚어내는 집단적 열광의 효과가 열띤 흥분으로 격렬함 뒤에 피어오른다. 우드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럭비는 하나의 종교와 같다. 모두 시니어 대회 우승을 손 모아 바라고, 럭비와 관련된 얘기가 아니면 관심조차 없다. 시골 외딴 기숙학교에 갇힌 남자아이들과 럭비의 속성이 만난 산물이다.

  그들 사회에서 럭비는 곧 정상(正常)의 조건이다. 럭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평범하지 않으며, 심지어 일반적인 것에 대한 배반이다. 네드는 공동체 내 소수자에 속하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별명은 호모게이, 동일 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의 별칭이다. 멍하게 앉아 있거나 음악을 듣곤 하는 그는 일종의 이단(異端)이다. 아무도 음악을 듣지 않기에 작문 숙제로 노래 가사를 써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공감 받지 못하는 소외를, 어느 정도 즐기기까지 하는 수준에 이른다.

  이 비밀스러운 장난은 노래 가사를 아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끝나게 된다. 음악은 네드 스스로 사회와 자신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연주도 하지 못하는 기타를 메고 다니면서 그는 위장했다.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도 버텨갈 힘을 은밀한 자의식으로 비축하곤 했다. 교사 쉐리와, 코너는 네드의 사적인 공간을 완전히 부수었다. 먼저 말을 걸고, 다그치기도 한다. 놀림과 멸시가 아닌 충고와 교감. 간단한 공감만으로 네드는 마음을 열고 우정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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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계를 거두어들이는 것에서 우정은 시작한다. 겉으로, 어울리지 못할 것으로 단정하고 가구를 꾸려 만든 ‘장벽’을 철거한다. 적막했던 방은 네드와 코너가 같이 부르는 노래로 메워진다. 친구가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당장이라도 자퇴를 소망했던 네드의 마음은 그렇게 바뀐다. 길을 따라 난 우정의 벽을 통해.

  코너에게도 음악은 의미가 깊다. 럭비 선수로서 특출한 재능을 가진 그는 반복된 연습과 감정적 절제를 강요받는다. “로봇이라는 생각이 든”다면서 하소연해보지만 그뿐,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 공을 찬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다 달리는 시간이 많고, 치고받으며 경기를 치르는 것에 희열을 느끼지만 “인생에는 좀 다른 게 있지”는 않을까 궁금해 한다. 닫힌 문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문을 열고 나가고 싶어 한다. 노래하면서, 네드와 합을 맞추면서 그는 소통에 발을 담근다. 그 순간에 그는 럭비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소년으로 존재한다.

  성정체성을 전교생 앞에서 폭로당한 후에도 그는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다만 왜 숨어 있어야 하는지, 자기 자신을 속여야만 하는지 분노하고 슬퍼한다.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혼란스럽지 않다.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너무도 떳떳하기에 그는 더는 피하고 싶지 않다. 동성애자인 교사 쉐리는 그날 밤 찾아온 코너에게 말한다. 줄곧 “너희의 인생을 살라”고 역설하던 그는 잔뜩 꼬리를 내리고 있다.


“가끔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겨야 할 때가 있어.
나중에 기회가 올 거야.”


"그런 날이 와요?"
그래나아질 거야.


  청소년 성소수자들의 반동성애 폭력 경험은 사회 저변에 만연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비합리적인 공포감이나 혐오감에 의한 폭력은 괴롭힘, 협박, 폭행 등 다양한 형태로 범해진다. 가족에게 학대와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1) 코너는 이 같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대응하거나 회피했다. 하지만 모든 손길을 막아낼 순 없는 법. 아무리 당찬 코너일지라도 홀몸으로 문을 열어젖히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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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필요한 것은 이해와 지지이다. 이기기 위한 목적론적 결집이 아닌 공감을 바탕으로 한 결속이 있어야 한다. 네드는 시니어 결승전을 앞두고 잠적한 코너를 찾아낸다. 끝내 무너진 코너에게 손을 뻗는다. 코너를 일으켜 세운 것은 ‘(Team)’이라는 단 한 글자였다. “네가 거기서 경기하면 그건 내 팀이”라는 말, 그저 너이기에 너를 응원한다는 간단한 문장. 인정과 포용. 코너는 단지 옆에 서 있어 주는 것을 원했다.

  무언가 바라는 우정은 결코 단단하지 못하다. 상대에게 제약을 두면 그 벽은 곧 깨어진다. 우정의 조건은, 어떠한 조건도 없는 것이다. 그 자체로 서로를 대하는 것, 넘어지면, 설사 자기가 넘어뜨렸더라도 얼른 부축해주는 것. 그리고 믿어주는 것.

  대부분의 명사는 그것과 명확히 상응하는 동사를 가진다. ‘연결’은 이어지다, ‘헌신’은 위하다, ‘행복’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만족한다, 로 치환이 가능하다. 우정은 ‘응원하다’로 읽힌다. 먼발치에서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기도한다. 한 번의 실수로 주저앉지 않기를. 뒤따라올 성공을 바라며.





이미지 출처
Google, IMDb

참고문헌
1) 강병철·하경희, 「청소년 동성애자의 반동성애 폭력경험과 심리사회적 특성」,
아동권리연구, 제10권 제3호, 한국아동권리학회, 2006, p.2-3


[강범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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