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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우리는 그저 그런 가족 [도서]

『세일즈맨의 죽음』, 『밤으로의 긴 여로』

by 차승환 에디터
2026.05.2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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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세상에 발을 딛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장 단단하게 이어지는 공동체는 단연 가족이다. 우리의 탄생에 생물학적 부모의 성적 결합은 필연적이고, 세상에 나와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타인 역시 부모(때때로는 모 단독)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의미에서 가족은 나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이지만 그 연결이 절대불변한 것만은 아니어서, 개별 구성원이 지닌 타자성을 끝내 끌어안지 못할 때 가족은 가장 질긴(혹은 차마 끊어버리기 어려운) 악연이 되기도 한다. 가족의 그러함은 그래서 늘 어지럽고, 그 복잡한 상처를 품은 이야기들이 언제나 그러하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민음사, 2009)과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민음사, 2002)를 함께 읽는다.

 

 

 

살아서 벌써 죽었을 때, 『세일즈맨의 죽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맞이하는 슬픔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겠지만, 사랑했던 가족의 사회적 죽음을 목도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고통스럽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은  한 가정의 늙은 가장의 사회적 임종 과정을 쓰라리게 그려낸다. 1940년대 미국의 세일즈맨 윌리 로먼, 비록 “성마른 기질과 성질, 황당한 꿈과 자잘한 심술궂음이 있다 해도” 그는 평생을 직장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세일즈맨으로서 화려한 업적을 쌓았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실적은커녕 먼 거리를 달리는 운전조차 버거운 노년이 되었지만 그는 차마 손에서 일을 놓을 수 없다(“물건을 팔아야지, 젠장!”). 맞닥뜨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지탱해야 할 아내와 두 아들이 있는 것.


인생의 “수많은 꿈과 계획 들이” 있었으나, 현실의 벽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 두 아들 비프와 해피는 윌리의 가장 큰 걱정거리다. 여러 직장을 전전하면서 변변치 않은 생계를 유지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비프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조악한 직장을 다닐 뿐인 해피는 힘을 합쳐 형제의 사업을 함께 시작하자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구체성 없이 막연하고 허무맹랑한 그들의 계획은 삶에 활력을 주는 꿈이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변명처럼 보인다. 두 아들이 어두컴컴한 미래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동안, 늙은 아버지 윌리는 반짝이던 과거의 기억 속으로 자주 되돌아간다. 자신의 능력은 충만했으며, 성공의 기회는 만연했고, 아들 비프의 매력과 재능은 풍부했던, 쇠락해가는 많은 영혼이 그렇듯 미화된 예전의 세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 이것은 분명한 죽음의 신호, 말하자면 육체보다 먼저 무너져가는 정신이 보내오는 불길한 죽음의 신호다.


그러므로 두 아들의 성공을 여전히 순진하게 믿는 윌리의 말은 씁쓸한 유언처럼 들린다. “세상에다 매운맛 좀 보여 줘! 너희 둘이 합치면 이 세상 전체를 먹고도 남지!” 사랑하는 가족에게 허망한 믿음 말고는 줄 수 있는 게 없을 때 세일즈맨은 자신의 죽음(의 필요)을 감각하며 산 채로 먼저 죽는다. 이 죽음은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상황이 만들어낸 사회적 죽음이자, 가족에 의해 가족에게 발생된 잔혹한 가족사(死)다. 언젠가 과거의 기억 속으로 돌아간 윌리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그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빛과 가족애로 가득했고 겨울엔 썰매 타느라 두 볼이 붉어지는 줄도 몰랐죠. 언제나 어떤 즐거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뭔가 좋은 일이 앞에 있었어요.” 긴 시간을 건너 현재에 이르렀을 때 마주한 아들 비프의 대답은 이렇다. “그게 누구 잘못이겠어요!” 당신의 미래였던 우리의 현재는 오로지 당신 탓이라는 것. 사랑하는 가족이 내린 잔인한 선고, 그것을 집행하는 것까지가 가장인 윌리의 몫이다. 그는 죽은 채로 죽음을 향해 다시 질주한다.

 

 

 

하루를 너무 길게 만드는, 『밤으로의 긴 여로』


 

대공황 이후 붕괴된 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해 살해당한 가족이 있다면, 모두가 잠들 수 있는 고요한 밤만을 기다리며 함께 죽어가는 가족도 있다. 여름철 한낮의 더위보다 끔찍한 것이 잠에서 깨어나 나와 대면하고 있는 서로가 돼버린 사람들. 서로의 존재가 명확해지는 한낮보다 서로의 모습이 안개 속에 묻혀 조용해진 밤이 차라리 편안하게 느껴지는 관계가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유진 오닐이 묘사하는 가족의 초상이다. 문제는 가족이 분명하게 존재할 때 그 존재가 언제까지나 희미하게 숨어있을 수는 없다는 것.


아침 식사를 마친 타이론과 메리 부부가 정겨운 듯 평범하게 나누는 대화에서 묘하게 긴장감이 느껴진다. 두 아들 제이미와 에드먼드는 쾌활한 동시에 어쩐지 냉소적인 태도로 부모를 대한다. 억지로 늘어난 고무줄처럼 잘못 건드리면 당장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가족의 대화는 위태롭게 이어진다. 이들은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일은 피하려는 듯 어느 지점에 이르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리곤 하는데, 그들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알면서 묵인하고 있는 각자의 진실이다. 경제적 성공을 거둔 배우였으나 그 여파로 가족의 안위보다 돈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 타이론, 가족에게 받은 상처로 모르핀 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메리, 막막한 진로 앞에서 방황하는 제이미와 폐병을 앓기 시작한 에드먼드까지, 이들 가족 구성원은 각자의 아픔을 앓고 있다.


건강한 가족이라면 구성원 개인의 통증을 함께 나누며 쓰다듬을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들이 앓고 있는 개별적 고통이 가족이라는 질긴 인연에 의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상처가 가족에 의해서 생겨났다는 사실을 지각하는 순간, 가족은 믿음으로 이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의심스러운 감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 지금 내가 앓고 있는 고통이 나의 가족인 당신의 탓일 때, 혹은 나의 고통을 가족의 도움으로 치유할 수 없거나 그로 인해 오히려 통증이 커질 때, 맘대로 잘라낼 수 없는 단단한 혈연관계는 끔찍해진다. 애정이라는 기본 정서 위에 상처와 미움과 원망이 복잡하게 얽혀 이어진 가족, 각자가 앓는 모습을 직시하기 힘들어 함께라는 사실마저 불편해지는 가족이라면 서로의 정체를 어둠 속에 숨기는 게 나을 수도 있을 테다. “안개가 좋아서요. 안개 속을 걷고 싶었어요.” 어떤 가족은 차라리 밤으로의 긴 기다림을 앓는다. 혹은 그 밤을 차마 견디지 못해 죽음처럼 질주한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서 우리는 가끔, 혹은 너무 자주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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