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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도시 잉여들의 쓰레기 찬가 - 힘든 귀가 [연극]

도시 잉여들의 자조적 해학극

by 진세민 에디터
2026.04.1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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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서울괴담의 연극 <힘든 귀가>가 2026년 3월 28일에서 4월 5일 대학로극장 쿼드에서 무대에 올랐다. 연극 <힘든 귀가>는 서울괴담의 2011년 초연작 <두할_할망할망>을 재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 도시의 쓰레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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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힘든 귀가>의 무대는 좌우를 갈라 하얗고 기다랗게 놓여 있다. 공연 전 무대의 한쪽 끝에는 고물처럼 보이는 잡동사니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다. 이곳은 서울역. 별사탕에 집착하는 위험남의 독백 직후 인물들은 고물산에서 시작하여 데굴데굴, 비틀비틀, 느릿느릿 각자의 물질성을 지니고 반대편으로 진군해 나간다. 똑바로 걷는 유일한 사람은 청소 노동자이다. 그는 자신의 빗자루를 가지고 커다란 비닐봉지를 공중으로 띄우며 역사 안을 청소한다. 청소 노동자가 비질하는 방향과 인물들이 굴러가는 방향은 일치한다. 청소 노동자가 치우는 것이 쓰레기라면, 이 무대 위에 존재하는 인물들 역시 쓰레기가 된다. 굴러가는 인물들의 모양새는 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회백색으로 아무렇게나 분칠된 인물들의 얼굴은 그들의 존재가 이 사회에서 이미 재가 되어 사라졌음을 보여준다.

 

고물산 아래 비닐봉지를 뒤집어쓴 채 누워있던 노숙남은 무대 중앙으로 굴러와 그대로 주저앉는다. 노숙남은 말이 많다. 흰색 분으로 떡칠한 얼굴에는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며 비참한 이야기를 광대와 같이 우습게 풀어낸다. 자신이 자기 아들을 차로 치어 죽게 했다고, 자신은 주물 노동자였으나 기계가 바뀌며 해고를 당했다고 자기의 이야기를 쉬지 않고 해낸다. 약간의 돈과 담배를 관객에게 요청 혹은 구걸하는 것은 덤이다. 그의 결론은 웃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관객 역시 노숙남의 이야기에 웃음이 난다. 좌우에 앉은 관객들은 서로에 웃는 얼굴을 확인한다. 이를 통해 청소 노동자가 치워내던 도시의 쓰레기들이 관객석까지 확장된다. 비참함은 아무래도 우습게 이야기돼야 한다. 비참함은 피할 수 없어도 우리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비참함의 무게만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해학의 정신이다. 사람이 죽고 해고되는 웃기지 않은 이야기에 폭소가 나오는 까닭은 우리도 같은 짐에 짓눌려 있기 때문 아닐까.

 

 

 

귀가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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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남의 몸 안에는 많은 것이 있다. 집이 없기에 자신의 몸 자체가 집이 된 까닭이다. 가슴 주머니에는 소주병과 권총이 있다. 그는 길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권총을 쓰다듬는다. 그 둘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노숙남은 결판을 보러 간다. 자신을 해고하고 위험남의 산재 사망을 덮은 사장을 만나러 간다. 사장의 책상에는 스타벅스 커피가 올라가 있지만, 사장은 노숙남에게 싸구려 캔 커피를 건넨다. 그깟 커피 한 잔 조차 존중받지 못한다. 노숙남은 캔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킨다. 사장 앞에서도 노숙남의 웃음은 멈추지 않는다. 웃느냐 배 아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사장과의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래도 대화가 아니다. 듣는 사람 없는 대화는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노숙남은 대화를 멈추기로 한다. 빵. 사장은 동작을 멈춘다. 사장의 사무실이 불에 탄 것인지, 그래서 사장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노숙남은 위험남의 동상을 역사 안에 세운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그의 몸뚱어리를 자신의 주물 기술을 통해 금빛 덩어리로 우뚝 세워 낸다. 언제나처럼 청소노동자가 등장한다. 그는 갑자기 세워진 이 설치물이 허가받은 대상인지를 역사 담당자와 통화한다. 역사 담당자는 허가받지 않은 설치물을 치우라고 지시한다. 청소노동자는 익살스럽게 서 있는 위험남을 쳐다본다. 그리고 치우지 않기로 하며 연극은 끝난다.

 

연극 <힘든 귀가>에는 쓰레기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가 등장한다. 첫째, 쓰레기들이 존재한다. 노숙남과 위험남을 비롯한 도시의 잉여들을 연극은 쓰레기에 비유한다. 위험남이 아끼던 별사탕이 바닥에 쏟아졌을 때, 거리의 비둘기들은 별사탕을 쪼아먹기에 바빴다. 급하게 먹다 쓰러진 비둘기를 청소 노동자는 아무렇지 않게 비닐에 묶어 내다 버린다. 살아있을 때는 쓰레기를 먹지만, 숨이 멈추자마자 쓰레기가 되는 순리이다. 쓰레기와 쓰레기가 아닌 것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둘째, 쓰레기 처분자들이 존재한다. 청소 노동자와 고물을 주워 생활하는 할머니다. 이들은 도시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을 거두어 처분하거나 삶에 일용하게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쓰레기와 관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들은 누구보다 쓰레기와 삶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노숙자와 비둘기가 없는 ‘깨끗한’ 역사라는 허상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럼에도 이들은 직접 자신의 손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청소 노동자 혹은 고물 줍는 할머니와 같은 처분자를 거쳐 처리를 지시할 뿐이다. 연극에서 이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목소리로만 존재, 그리고 암시된다.

 

도시는 끊임없이 쓰레기를 배출한다. 쓰레기야말로 도시의 진정한 힘이다. 우뚝 솟은 마천루들, 길거리의 교양 있는 사람들, 그것이 가짜다. 도시는 원래는 낮고 볼품없는 사람들의 땅이었다. 깨끗함은 더러움을 원한다. 근사함은 허접함을 원하고, 부유함은 빈곤함을 원한다. 절대로 만날 일 없는 성질들은 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샴쌍둥이다. 쓰레기 처분자로서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사이를 경유하는 신체로써 등장하는 할머니가 샴쌍둥이로 설정된 이유일 것이다. 연극의 마지막에서, 청소 노동자는 쓰레기인 동상을 치우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처분자로서 선을 지키던 청소 노동자가 자신도 결국 쓰레기임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도시는 계속하여 쓰레기를 내뿜는다. 아직 내 차례가 오지 않았다면 다행일 뿐이다. 연극 <힘든 귀가>는 도시의 생리를 함부로 긍정하거나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어이없는 이 세계를 주저앉아 크게 웃어줄 뿐이다. 우리에겐 갈 곳이 없지 않은가. 귀가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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