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중에서도 죄 없는 꽃이 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용서하는 꽃이 수선화로 피어난다
꽃 중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꽃이
서귀포 검은 돌담 밑에 수선화로 피어난다
이른 봄에 수선화를 만나러 가면 추사 선생을 꼭 만난다
이듬해 이른 봄에도
추사 선생을 만나러 가면 수선화를 꼭 만난다
사람 중에서도 가장 죄 없는 사람이 수선화로 피어나
온 나라를 수선화 향기로 가득 채운다
겨우내 세한의 소나무에 앉아 있던 작은 새 한마리
나뭇가지 사이로 푸드덕 흰 눈을 털며
우리는 오래도록 잊지 말자고
봄이 오지 않아도 수선화는 피어난다고
수선화가 피어나기 때문에 봄은 온다고
추사 선생처럼 수선화를 바라보며
바다로 가는 봄길을 걷는다
정호승, 「수선화」 전문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illust by 아현(雅玄)
교양 과제를 위해 시집을 빌렸다. 천천히 시를 곱씹기엔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 속에서 무언가 돌아볼 여유도 없을 것만 같았는데,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던 중 문득 어떤 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꽃 중에서도 죄 없는 꽃이 수선화로 피어난다고.
왜 하필 수선화일까. 세상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화려하고 소담한 초목들 중에 시인은 왜 수선화를 골랐을까.
수선화는 왜 죄 없는 꽃이고, 용서하는 꽃이고, 가장 사랑하는 꽃일까.
조용한 의문을 남기면서도 독자를 '서귀포 검은 돌담 밑'으로, '추사 선생'에게로 이끌어 데려가는 시어들. 담담하게 그려지는 제주도 바닷가, 초가에 번진 묵향을 떠올린다. 나도 모르게 시를 되새기며 시집을 골랐다. 여섯 페이지짜리 문학 평론을 쓰면서도 나도 모르게 계속 되돌아가 읽게 되던 시.
오랜만에 마주한 시인의 이야기를, 나의 글씨로 옮겨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