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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좋아하는가?


나는 아직도 종종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 태어날 때부터 붙여진 이름인데도, 그것으로 불리고 그것으로 정의되는 순간마다 묘한 이질감이 찾아온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언어가 곧 나를 설명하는 도장이 되어버리는 것. 어떤 날은 그 사실이 불편하고, 어떤 날은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내 주위에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반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그 차이는 크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누구든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자기 존재를 또렷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이름을 부른다. 누군가를 부르고, 또 누군가에게 불린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 속에는 사실 수많은 층위의 감정과 의미가 겹쳐 있다. 이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나는 언어이며, 누군가가 불러주어야 비로소 존재의 형태를 갖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中

 

 

이름은 우리 삶에서 늘 그렇게 관계의 무늬를 남긴다. 우리는 반려동물에게, 반려 식물에게, 심지어 애착 인형이나 낡은 물건에도 이름을 지어준다. 그 순간, 사물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하나의 존재로 서게 된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곧 ‘너는 나와 관계 맺은 존재’를 의미한다.

 

나는 늘 흔한 이름 속에 살아왔다. 스무 명이 모이면 한 명쯤은 꼭 같은 이름을 가진다. 동명이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성’은 단순한 부차적 호칭이 아니라, 수많은 동명이인 속에서 그 사람만을 가리키는 유일한 수단이자, 그 사람을 담아내려는 의지였다.

 

가까운 친구를 부를 때조차 성을 붙여 이름을 부르게 되는 건, 그 사람의 전체를 불러내고 싶다는, 작은 몸짓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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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면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2018) 속에 있다.

 

엘리오(티모시 샬라메 분)는 올리버(아미 해머 분)를 부르며 자신의 이름을 건네고, 올리버 역시 엘리오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는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라는 가장 친밀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둘의 사랑이 끝내 지속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이름을 건넴으로써 나와 너의 경계는 사라졌지만, 각자의 이름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더욱 분명해졌다. 영화 속 한여름의 햇볕만큼이나 뜨겁게 반짝였던 사랑의 결말은 어쩌면 서로의 이름을 담지 못한 순간 결말이 정해진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성을 붙여 부르는 나의 습관도 어쩌면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흔한 이름 속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불러줌으로써 ‘너는 그 누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라고 확인하는 것. 단순히 존칭이나 격식을 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동일함 속에서 그 사람만의 고유함을 불러내려는 애정의 방식이다.

 

우리는 종종 이름을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름은 태어날 때 처음으로 주어지는 가장 오래된 선물이자,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드는 기호다. 장례식장의 위패에 남는 것도 결국 이름이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는 것도 이름이다. 이름이란 결국 나 자신이며,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순도 높은 언어이다.

 

그렇기에 나는 누군가를 부를 때 조심스러워진다. 그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성을 붙여 부르는 것도, 애칭을 만들어 부르는 것도, 다 그 사람만의 존재를 불러내려는 마음의 발현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되고, 또 서로의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뜨겁게 기억을 파고드는 이름이란 그을림은, 서로를 비추는 순간마다 짧지만 깊게, 온전히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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