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큰일 났어.” 작은이모가 말했다. 엄마는 무슨 일이 생겼냐며 돌아봤고, 작은이모는 빨간 약통을 흔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비타민이 가루가 아니라 알약이야. 엄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 큰일 난 줄 알고. 작은이모는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야, 아빠 돌아가신 마당에 이것보다 큰일이 어디 있냐.”


엄마는 대답 없이 수육과 마늘종을 집어 먹었고, 나는 식혜를 마시다 말고 메모장을 켜서 급히 이 대화를 옮겨 적었다. 이런 메모들을 모아 보니 양이 꽤 되었고, 나는 여기에 <장례 일기>라는 제목을 붙여보기로 했다.

 

 

 

'너무 삶적인' 장례식장, 음식과 돈


 

큰이모부의 차엔 “0에서 시작한 가수들이 성공한 방식”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소리 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런 욕망이 있었던가 –이를테면 희망 같은 것- 잠시 생각했다. 차 안엔 커피잔 8개가 담긴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엄마와 이모들이 눈물을 참기 위해 목에 힘을 과하게 주어서 침이 부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하는 데에 필사적이었고,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문 밖을 향했다. 차량 하나 없는 주유소가 보였다. 녹슨 간판에 쓰인 “휘발유 가격” 글자 아래엔 1, 6, 7, 0이라는 숫자가 나열돼 있었다. 어쩌면 이 숫자를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크기변환]panyawat-auitpol-eq254Cqvmk8-unsplash.jpg

 


이번엔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지.

그러게, 진짜 멀다.

멀어.


우리는 각자 잊지 못할 장면을 눈에 담으며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2층 빈소로 올라가니 몇몇 가족들이 이미 와 있었다. 큰이모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올려두었다. 우리 아빠 젊네, 왜 이렇게 젊어, 같은 말을 주고받으며 옷장에서 상복을 꺼내 입었다. 그 흐름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모에게 건네받은 검은 저고리와 치마가 낯설지 않았다. 3개월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입었던 옷이니까.


상복을 입고 식당 의자에 앉으니 음식이 담긴 일회용품 접시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어째 그때보다 반찬이 부실하다. 작은이모는 나무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장례식장에선 죽지 못해 먹는다던데, 그때 우린 잘만 먹었잖아. 울기도 잘 울고. 이번에도 나무젓가락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장례식장에선 부지런해야 했다. 울기도 부지런하게, 먹기도 부지런하게. 그래야 죽음과 삶 사이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너무도 죽음적’인 장례식장에서 음식은 ‘너무도 삶적’이니까. 하늘이 떠나가라 울던 사람들도 육개장을 한 입 먹으면 육개장 이야기를 한다. 삼촌은 “이 장례식장은 올 때마다 육개장이 맵더라고.”라고 했고, 나는 “매운 고춧가루를 쓰나 봐요.”라고 답했다. 명절날 한정식집에서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 장례식장 식당에서 오갔다.


‘너무 삶적인’ 건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저녁 10시가 되면 손자·손녀 6명은 통에 담긴 부의금 봉투를 책상 위에 쏟아붓고, 소속·성함·액수를 엑셀 파일에 정리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합을 맞춰봐서인지, 모든 게 척척 진행됐다. 확인차 성함과 액수를 읊조리면 어른들은 한숨을 쉬며 “큰일이네.”라고 했다. 한 명 한 명 다 기억해 두고 똑같이 챙겨줘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모든 건 돈이고, 돈은 부담이었다. 이 논리가 장례식장에서도 통하는 게 새삼스러웠다.


어른들은 조문객이 오면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고, 손님들의 신발을 식당 쪽 신발장으로 옮기는 건 손자·손녀들의 몫이었다. 옮길 게 한두 켤레가 아니었으니 손으로 덥석덥석 집어 옮기다가 어른들을 경악하게 만든 우리의 손엔 신발집게가 쥐어졌다. 운동화는 옮기기에 아주 수월했고, 정장 구두와 샌들이 옮기기 어려웠다. 정장 구두는 너무 무거웠고 샌들은 집게 손이 끈 사이로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는 신발 브랜드라곤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가 전부였던 나는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집게로 신발을 옮기려면 손가락 어느 마디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구두들이 얼마나 무거운지도. 누군가는 구두의 무게로 죽음을 기억할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 무게를 잊지 말아야겠다고, 중지에 박인 굳은살에 손톱자국을 새기면서 생각했다.

 

 

 

살아있다는 것, 웃음과 유머 


 

접객실과 식당 옆엔 유족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힘에 부치면 유족실에 이불을 깔고 누워 눈을 붙였다. 얼른 나가서 신발 정리해야 하는데. 그렇게 잠들었다가 꿈을 꿨다. 꿈에서 나는 아주 큰 붉은 새였다. 새는 말했다. 내가 너희들의 모든 정념을 안고 떠나주겠다고. 새는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구를 발밑에 둘 정도로. 그리고 폭발한다. 우주로 나아간다. 날아간다. 산소가 희박해진다. 나는 지구에서 멀어졌다. 그 속도가 아주 빨랐다.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래, 이제 죽어도 되겠다고 생각할 때쯤.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인 상태로 급하게 기록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꿈에서 깼다. 열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언제 큰 충격이 올지 모른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좋은 일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좋은 일이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니 어느새 입관 시간이 다 되었다. 가족들이 고인과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2층 빈소에서 입관실이 있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내내 삼촌이 다니는 교회에서 나와주신 분들이 찬송가를 불러주셨다.


입관실은 팔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서늘했다. 할아버지는 철제로 된 침대 위에 누워 계셨다. 그를 만졌을 때 그의 살과 뼈가 느껴지진 않았다. 한지로 감싼 탓이었다. 장례지도사는 면도해드리고 몸도 잘 닦아드렸다며, 한지로 곱게 감싸드렸으니 촉감에 놀라지 말라고 했다. 너무 울면 마지막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을 테니 하고 싶은 말 전부 하고 잘 보내드려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얼굴과 팔다리를 끊임없이 쓰다듬으며 울었다. 아빠 사랑해요, 죄송했어요, 편하게 가세요. 자식의 자식들은 제 부모가 주저앉지 않도록 팔을 꼭 붙들었다. 울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장례식장에선 의외로 고인을 잃은 슬픔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다. 너무 삶적인 것들과 장례식장을 찾아준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 그제야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의 무게를 실감한다.

 

 

[크기변환]vidar-nordli-mathisen-nvlB39rzdQE-unsplash.jpg

 

 

그 무게를 버티게 해준 건 웃음과 유머였다.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 날, 버스를 타고 가던 길에 장례지도사는 우리에게 어떤 사진을 보여줬다. 하트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구름이었다. 저희 아내가 보았다네요, 아버님이 어머님 만나셨나 봐요. 자세히 보시면 하트 가운데가 살짝 띄워져 있어요. 어머님이 아직 삐지셨나 보네.


그러니까. 뭐 여기까지 따라왔냐고 하시나 보네.


우리는 버스에서 한바탕 웃었다. 이모들은 그 사진을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웃음과 유머가 없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무너졌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당신의 이야기, 빨대와 안녕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한 달 전이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하시던, 통풍 문제로 속옷도 벗고 있던 당신을 기억한다. 당신은 이런 모습을 보여줘 미안하다고 세 번쯤 말씀하셨다. 그런 분이 아니셨다. “물 좀 다오.” 당신은 그렇게 말했고 나는 협탁 위에 놓은 물잔을 건네며 입에 갖다 대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마른 팔로 컵을 받아들였다. 나중에야 알았다. 당신은 컵을 들 힘이 없어 요양보호사가 빨대를 꽂은 컵을 입에 가져다드려야만 물을 드실 수 있었단 사실을.


당신은 부끄러워하셨다.

나는 2N년 동안 보아온 당신보다, 부끄러워하던 그 모습을 오래 기억하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책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 남긴 인간의 말이 가장 정확할 때가 있는 법이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게 할아버지는 담배를 좋아하는 엄한 분이었고, 자식들에게 다정한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고 알고 있었다. 그가 한평생 기록에 열중하셨고, 암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매일 일기를 쓰셨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우리 두 손 꼭 잡고 같이 잘살아 보자고 할 정도의 다정함을 가진 분이셨다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만 썼다.


“안녕.”


그 후로도 쭉 이어지던 일기는 할아버지가 응급실에 들어가면서 끝났다.

대답 없는 인사를 활자로 적었던 할아버지에게, 이렇게나마 써본다. 언젠가 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안녕.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