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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세종문화회관] 유령 포스터.jpg

 

 

 

픽션과의 거리감


 

픽션은 그 형식부터가 현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영화는 대형 스크린과 푹신푹신한 객석, 책은 종이와 까만 글자, 게임은 강아지 발바닥 모양의 버튼과 스크린, 연극이나 뮤지컬을 비롯한 각종 공연은 무대가 있다. 내 기억을 토대로 하는 무의식의 예술, 꿈도 잠이라는 단계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나는 그런 거리감이 막연히 좋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한번 그건 픽션을 감상하는 나 자신이 픽션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사람, 픽션으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거 아닐까 싶어져 씁쓸해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픽션의 그런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거리가 있어야 전체적인 시야가 확보되고,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 새로운 것들, 낯선 것들이 익숙한 것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뇌리에 박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거리를 두고 삶을 바라볼 때도 잘 없지 않나 싶다. 하루하루를 되는대로 살다 보니, 폭주기관차 같이 하루를 치러내고 나면 공허함, 허무함만 남는 경우가 흔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분명 그런 날이 있다. 갤러리 사진을 정리하다가 문득 한 사진에 멈춰서 내가 이렇게 살았구나, 뇌까리는 날이. 그렇게 지금과 과거의 어느 하루와의 거리감이 획득되며 인생을 조망하는 날이 있다.


픽션이 거리를 설정하는 건 그 거리가 픽션과 우리를 잇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픽션은 거리를 만드는 동시에 연결한다. 거리 자체가 연결이다. 거리란 멀어지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뻗어나가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 거리를 주파하기까지의 시간은 몰입의 경험을 선사한다. 나와 전혀 다른 처지에 놓인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서도 감동을 받는 건, 그와 내가 어느 한순간 연결되기 때문이다. 픽션에서 두드러지는 무언가와, 나에게 침잠해 있던 무언가가 끌어올려져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내가 픽션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그 연결 때문이다.

 

 

 

심상하면서도 심상 않은


 

픽션이 의도하는 그런 연결은 주로 후반부에 있다. 그런데 연극 <유령>은 그 공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세종문화회관 S 씨어터의 무대와 객석 사이를 구분하는 건 무릎 높이의 울타리가 다였다. 무대는 객석 맨 앞자리보다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동네 공원처럼, 누구나 거기 가서 농구를 하든, 테니스를 치든, 요가를 하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내가 더욱 당황했던 건 안내받은 자리가 무대 옆쪽, 측면이었기 때문이다. 무대 맞은편의 객석은 그래도 울타리랑 거리가 있는 편인데, 무대 측면 자리는 무대의 일부라고 해도 될 만큼 가깝고 무대와의 구분이 모호했다. 동물원에 그런 울타리를 쳐놓는다면 모든 동물이 탈출하고도 남을 것 같은, 매우 친환경적인 울타리. 그때부터 초조함은 시작되었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04.jpg

 

 

연극은 주연 배우인 이지하 배우가 사전 무대인사처럼 등장하며 던진 수상한 말 한마디와 함께 시작되었다.


“저는 배씨였다가, 정씨였다가, 다시 배씨가 될 예정입니다.”


극의 초반엔 남편(강신구 배우)의 폭력에 휘둘리는 배명순의 삶이 핍진하게 드러난다. 분장사(전유경 배우)가 등장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을 분장해 준다는 점이 특이한 것 말고는 클리셰 같다고 생각했다. 폭력을 경쾌하게 재현하는 방식이. 줄거리를 따라가고 말겠구나, 사실 그게 정직한 것일 텐데 나는 차차 이 연극에 기대를 접고 있었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06.jpg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한 배명순이 정순임이란 이름으로 찜질방이나 식당 등 여기저기 떠돌면서 그녀에게 또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그러던 도중 무대 한쪽에 웬 분장대가 배치되고, 배우들이 옷을 입었다, 벗었다, 분장을 했다 고쳤다 하면서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다시 마주한, 방금 전엔 남편 역할이었지만 지금은 나쁜 사장 역할인 남자 배우가 정순임에게 혐오적인 대사를 하다 말고 갑자기 이의를 제기한다. 음? 잠시만?

 

 

 

배역 VS 정체성


 

마치 리허설을 하다가 NG가 난 것처럼 극이 중단된다. 무대감독(이승우 배우)이 나타나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지만, 연출가가 돌연 사라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모두가 아비규환에 빠진다. 아직 모습을 보인 적 없는 배우들(신현종 배우, 홍의준 배우)이 무대 뒤에서 우당탕탕 등장하고, 객석에 앉아 있던 배우(김신기 배우)가 난입하는 등 난리도 아니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30.jpg

 

 

이 위화감은 뭘까.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어야 하나.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거기서부터다. 나는 어느새 관객의 본분을 잊은 채, 마치 누군가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따지고 있었다. 이 연극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고쳐나갈 수 있을지. 물론 그 대사 하나 때문일 텐데,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을, 거슬러도 될까? 그러니까 배우들을 무대에 올라서게 한 그 운명을.


그러나 배우들은 그 운명에 불만을 표출한다. 무대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긴 했지만, 결코 지울 수 없는 배역,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맡은 역할 사이의 분열이 생기며 그들 내면에 혼란이 찾아온다. 그 운명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주시할 연출가가 쏙 빠진 마당에 그 운명을 그대로 따를 필요가 있는가 싶어진 것이다.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어떤 반응이든 해도 된다. 말도 안 된다, 저게 뭐냐. 그런데 무대 위의 배우가 그런 반응을 보이니 독특했다. 자기반성적, 성찰적인 이의제기라니.

 

 

 

유령이 되어


 

난장판이 어찌저찌 수습되어 배우들은 다시 극을 이어간다. 이야기는 다시 정순임, 아니 배명순의 서사로 흘러가, 그녀가 길을 떠돌다가 암에 걸리고 무연고자로 사망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그녀는 무대 뒤편에 창문 같기도, 감옥 같기도 한 시신 안치실에 안치된다. 그리고, 유령이 된다.


좀 전에 우당탕탕 등장했던 배우들과 나란히 유령의 모습으로 등장한 배명순. 그러나 그들은 이제 이름 없는, 누구도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유령이 되어 있다. 누구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 그래서 냉동된 채 갇혀 있는. 저 하늘로 떠오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존재들. 그들은 무대 앞에 나서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기 시작한다. 한 번도 주연이었던 적 없던 그들은 죽어서야, 이름 없는 유령이 되어서야 주연이 된다. 그들을 지켜보는 객석의 나 또한 유령이 된 기분으로 그들을 본다. 폭력과 가난, 가혹한 노동, 소외로 얼룩진, 그 얼룩 때문에 사회 가장자리에 내몰려 지워진 그들의 삶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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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연극 <유령>은 연극을 진행해야 하는 배우, 스태프들의 아수라장 같지만 메타적인 토론과, 배명순을 비롯한 유령이 되어버린 존재들의 이야기를 능란하게 엮어나가며 제목인 ‘유령’의 의미를 차츰차츰 심화한다.


분장을 바꿀 때마다 역할이 바뀌는 것처럼 정체성이란, 역할이란 뒤집어씌워지는 것이다. 배명순이 그런 것처럼 스스로 마음이 이끌려 그 가면을 쓴다기보다는, 무언가에서 도망치고,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이 와서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세종문화회관] 연극 유령 프레스콜_26.jpg

 

 

그렇게 모습을 계속해서 바꿔가다 보면 일순간 그럼 나는 누구인가, 하는 혼란이 찾아온다. 이 분장을 전부 지우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건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닌가. 스스로에게 되묻는 이지하 배우의 대사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배우들에게 찾아올 법한 그런 혼란은 “세상은 무대, 인간은 배우.”라는 대사로 인해 인간 모두에게 확장된다. 나는 극이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을 무연고자로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역할도 맡지 않는 역할, 유령.

 

 

 

존중의 안녕


 

누구도 그 죽음을 반기지 않으며 심지어 귀찮게까지 여기는 무연고자란 얼마나 서글픈 역할인가. 누군가에겐 생소한 배역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무연고 사망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극에서도 지자체의 예산 삭감 때문에, 관계자들의 귀찮음 때문에 그들에게 장례를 치러줄 수가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사람을 모으면서 사람을 소외시키는 사회. 배우들의 아수라장에 웃고 웃다가 그런 아이러니에 이르면 굉장히 쓴 걸 삼킨 것처럼 씁쓸해진다.


연출가가 남긴 결론이 모두에게 공유되며 극은 마무리로 치닫는다. 무심코 던진 담뱃불에 시신 안치실에 불이 나는 식으로 끝맺기로 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무연고자의 화장이다. 마치 굿판을 벌이는 것처럼 경건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세 유령은 자신의 육신에게 안녕을 건넨다.


세상에서 소외되어 여기 안치실에 차갑게 눕혀진 자신과 작별하는 그들을 측면에 앉아서 보며, 배우와 내가 지금 같은 걸 느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역할을 뒤바꿔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살면서 하고 싶은 게 있었던 이름 모를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유령들과 연결되면서 나는 사람 개개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얻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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