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이 어느덧 시즌 4로 돌아왔다.
OTT 서비스를 구독하는 사람들이라면 뭘 봐야 할지 고민하다가 찜 목록만 한가득 채우고서는 결국 유튜브로 넘어가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영화 한 편만큼의 시간을 허비했던 적이 많은 나에게 <러브, 데스 + 로봇> 시리즈는 마치 들어둔 보험 같았다.
에피소드 식 구성 덕분에 모든 회차를 보지 않아도 끌리는 에피소드를 골라볼 수 있고, 한 회차당 러닝타임도 대부분 20분 내외여서 부담이 없다.
오늘은 시즌 1부터 4까지의 시리즈 중 꼭 한 번 시청하면 좋을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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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러브, 데스 + 로봇> 일부 회차의
줄거리 및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즌 1 | 세 대의 로봇
시즌 1의 첫 에피소드로 만나볼 수 있는 <세 대의 로봇>은 인류 멸망 이후의 세상을 견학(?)하고 있는 세 대의 로봇에 관한 이야기이다.
로봇들이 다니는 곳에는 해골이 즐비하다. 멸망 전의 평범한 생활 모습들을 비롯해 멸망을 앞둔 절망감 가득한 모습 등은 마치 유적지 같으면서도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 로봇들이 나누는 대화는 그런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인간은 막대기 같은 걸 들고 공을 때리기도 했대.”“공이 버릇없었던 거야?”“나쁜 공아, 네가 한 짓을 잘 생각해 봐.”
로봇의 관점에서 인간들이 어떤 행위를 왜 했는지 추측하는 것이 대화의 주된 내용인데, 완벽하게 억측하는 로봇들의 모습을 보며 가볍게 웃을 수 있다.
결말까지 웃을 수 있는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작품이라서 시즌 1의 첫 에피소드로 가볍게 보고 시작하면 좋을 듯하다. 시즌 3에는 <세 대의 로봇: 출구 전략>이라는 제목의 후속편이 있다.
시즌 2 | 거인의 죽음
<거인의 죽음>은 시즌 2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에피소드이다.
한 거인이 해변가에 죽어있고,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거대한 존재 옆의 인간들은 마치 미니어처같이 보일 정도로 하찮다. 주인공과 함께 간 조사원 일행이 거인의 몸에 올라타자, 주변에 있던 모두가 거인 위에 올라타 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며 거인의 시신에는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이 잦아들게 된다.
해변가에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의 사체를 예전에 영상으로 본 적이 있다. 거인의 시신은 그 장면을 연상케 했다. 어쩌면 ‘거인‘은 자연에서 죽어간 수많은 생물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이 길가에 쓰레기를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보다 거인이 더 살아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다시 보면, 끝없이 이기적인 인간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묵묵히 그런 것을 감내하는 자연의 자애로움을 존중한다는 뜻을 내포하는 듯했다.
“거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눈치챘는지연구소의 내 동료들은 거인을 관찰하는 임무를 내게 맡겼다.섬뜩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왜냐하면 사실상 내게 그 거인은 여전히 살아있었으니까.사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보다 더 살아있는 듯했다.”
푸르게 변해버린 거인의 눈동자에 주인공의 얼굴이 비치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거인의 눈동자 주변에 작게 무언가 보여서 유심히 보니 담배꽁초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인의 죽음>은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에피소드로서 굉장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자세히 보기 전까지는 애니메이션인지 아닌지 못 알아챌 정도였고, 덕분에 주인공과 함께 거인을 유심히 관찰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시즌 3 | 나이트 오브 미니 데드
시즌 3는 <어긋난 항해>와 <히바로>라는 작품이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작품 모두 스토리와 애니메이션의 질감이 뛰어나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는데, 이 시즌에서는 이미 유명한 이 두 작품을 제외한 다른 작품을 추천하고자 한다.
<나이트 오브 미니 데드>는 한 커플이 묘지에서 벌인 생각 없는 행위로 인해 전 세계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는 단순한 내용이다.
빠르게 전환되는 컷들 덕분에 상황의 긴박함이 느껴지긴 하지만, 아무래도 미니어처로 묘사된 지라 생각보다 심각하게 와닿지는 않고 오히려 귀여우면서 애잔하다는 느낌이 든다.
급속도로 늘어나는 좀비들과 이에 반격하는 인간들의 모습들이 나오며 들리는 베르디의 <진노의 날>은 그나마 웅장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래도 여전히 앙증맞다)
잘 이겨내나 싶었지만 계속되는 다양한 반격에 적응해 버린 좀비 군단은 점점 막을 수 없는 강한 존재로 진화하게 되고, 결국 남은 인류는 자멸을 택하게 된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지구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끊임없이 미니어처 뷰를 고집하며 모든 장면을 하찮고 별일 아닌 것처럼 묘사한 이유는, 바로 인류와 지구가 그만큼 작디작은 존재임을 풍자하고자 한 게 아닐까 싶다.
보는 내내 지구를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나이트 오브 미니 데드>는 시즌 4에서 <미니와의 조우>라는 에피소드로 새롭게 만나볼 수 있다.
시즌 4 | 똑똑한 가전제품, 멍청한 주인
<똑똑한 가전제품, 멍청한 주인> 에피소드는 앞서 언급했던 <세 대의 로봇> 시리즈의 패트릭 오스본 감독이 제작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쓰는 물건에 지능이 있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그 상상의 나래를 성인용으로 펼친 애니메이션이다.
온도 조절기, 전동 칫솔, 샤워기 등 일상에서 우리가 쓰는 여러 물건의 신세 한탄을 차례대로 들어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후반부로 갈수록 물건들이 점차 안쓰러워지는데, 그 대미를 장식한 것은 고양이 전용 화장실이었다.
교훈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지만, 평소에 내가 쓰는 물건들을 싹 훑어보며 그것들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나름 돌아볼 수 있다.
<러브, 데스 + 로봇> 시리즈 중 몇 안 되는 어렵지 않고 가볍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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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러브, 데스 + 로봇> 시즌 1부터 4의 재미있게 볼만한 몇몇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보았다.
아무래도 시즌 2를 제외하면 모두 19세 관람가인지라 잔혹한 장면도 많고, 암울한 결말로 끝나는 작품들이 많다. 또,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보니 짧은 시간 안에 긴 이야기를 담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전개가 갑작스럽거나 마무리가 시원찮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내용 자체가 심오해서 단편적으로 보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도 정말 많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한 편이 끝나고 남는 여운이 길고, 꽤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스토리를 곱씹어보며 해석하는 재미가 있는 시리즈물이다.
단편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느끼게 해주는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데스 + 로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