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아트 뮤지엄에서 25년 7월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의 풀 네임은 「아르누보의 꽃 : 알폰스 무하 원화전」이다. 포스터에서부터 여성스러움과 꽃 내음이 물씬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도 무하는 섬세하고 낭만적이며, 만물이 개화하는 봄 같은 이미지의 화가였다. 그래서 전시회를 보러 가는 길에 강남구의 전시장보다는 꽃 축제에 방문하는 느낌이었다. 유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눈에 담을 준비가 됐다.
하지만 막상 전시회장에 발을 들이고 나서는 다른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알폰스 무하의 그림과 배경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단단하고 꼿꼿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는 가늘고 섬세하지만 테두리만은 굵게 두르는 특유의 화풍처럼, 다정함을 기반으로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굳건한 화가였다.
해당 리뷰에서는 개별 작품의 디테일보다는 작가의 일생을 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전시의 스포일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화가의 배경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이니, 「알폰스 무하 원화전」을 보러 갈 예정인 사람이라면 계속 읽어내려주기를 바란다. 본격적으로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화가에 대한 애정이 커질 것이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 Alfons Maria Mucha
한 독신주의자 여성이 있었다. 30대까지 비혼을 고수하던 그녀는 어느 날 꿈을 꾸게 된다. 천사들이 내려와서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의아하게 여기던 와중에 그녀의 친척에게서 편지가 한 통 날아오게 된다. 바로 마지막으로 중매를 권하는 편지였다. 이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아이 셋 딸린 홀아비와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알폰스 무하는 누구일까?
바로 비혼주의였던 아말리에와 법원 직원 온드르제이의 아들이다. 시골에 살던 그는 어릴 적부터 집안 벽지와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놀았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성화를 자주 그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런 무하에게 후원자가 생겼다. 바로 모리비아 남쪽 미쿨로프의 쿠헨 벨라시 백작이었다. 백작 덕분에 무하는 뮌헨 미술원과 여러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원이 끊겨버리게 된다. 이유인 즉슨 무하가 1년이 넘게 그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련 기간이 끝났으니 독립심을 기르라는 뜻이었다는 설도 있고, 단순히 늦어지는 게 괘씸해서 속 좁게 끊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파리로 간 무하는 스타가 됐으니까.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져 있었다
1894년 크리스마스. 모두가 행복한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발을 구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인쇄소의 직원이었다. 인쇄소는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연극배우였던 '사라 베르나르'가 감독하고 출연한 「지스몽다」의 광고 포스터 제작을 맡았다. 연극 개막일은 1월 4일이었는데, 아직까지 포스터가 완성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직원들은 전부 휴가를 나가 버렸다.
그 순간, 머리를 부여잡던 직원은 인쇄소에 남아 있던 누군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무명의 삽화가였던 알폰스 무하였다. 사실 그는 이전까지만 해도 석판화 일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의뢰가 들어오자 일단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곧장 극장으로 가서 리허설 중인 연극 무대를 직접 감상했다. 그리고 며칠 내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1895년 1월 1일, 「지스몽다」 포스터가 파리 전역에 등장하게 된다.
포스터를 본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동안 존재하지 않던 파격적인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공연 제목과 장소, 배우의 이름과 같은 기본적인 정보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게다가 보통 성인보다 몇 뼘은 더 커다란 크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포스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하룻밤 만에 거리의 포스터가 전부 뜯어져 버렸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반한 사람들이 전부 훔쳐 간 것이다.
10대에는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서 낙방했고, 20대에는 취직한 일자리에 불이 났다. 후원자가 생겼지만 자리를 잡기 전에 내쳐졌다. 그리고 30대, 마침내 파리의 스타가 됐다. 삽화가 제롬 두세는 잡지 「레뷰 일뤼스트레」에서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하룻밤 사이 파리의 모든 시민이 무하의 이름을 알게 됐다."
무하를 순식간에 스타로 만들어준 결정적 작품은 마이아트 뮤지엄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다.
안정과 휴식을 뒤로하고 프라하로
이후로 무하의 화가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순수미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허물며 예술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즉, 상업예술을 하며 엄청난 돈을 벌면서도 순수미술로서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많은 화가들의 로망인 현상이다.
명예도 있었고, 돈도 벌었고, 말년에는 적당히 쉬면서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무하는 의외의 선택을 한다. 고향인 체코의 프라하 돌아가서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라는 대장정을 걷게 된다.
쉽지 않은 결심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무하의 조국은 항상 침략을 받았다.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웃 강대국들이 슬라브족을 만만하게 보고 노예로 납치해 가는 일이 하도 빈번해서 'Slave'라는 단어가 아예 노예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슬라브족은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고자 했다. 이전에 우리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한'을 가지고 민족의 고유성을 지키고자 했다. 무하 역시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누구보다 바랐다.
"나는 미국에서 부, 명성, 안락함을 기대하지 않아. 조금 더 유용한 일을 할 기회를 찾을 뿐이야."
결국 조국으로 돌아온 무하는 1,000년이 넘는 슬라브족의 역사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과 슬라브계 국가 세르비아 사이에 갈등이 고조됐고, 4년의 전쟁 끝에 마침내 신생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했다. 다행히 무하는 조국의 독립을 보고 나서, 기꺼이 무보수로 지폐와 우표 디자인을 할 정도로 행복해한 뒤에 눈을 감았다.
아쉽게도 이번 전시는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의 「슬라브 서사시」 위주는 아니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 정신이 담긴 다른 작품이 충분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식민지 역사를 가졌기에 더욱 와닿는
당시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통치하고 있던 정부가 설립한 학교는 독일어만 가르쳤다. 그래서 체코와 모라비아의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단체가 생겼다. 이들은 1코루나에 복권을 판매하며 기금을 모았다.
의미 있는 단체를 눈여겨 본 무하가 복권의 디자인을 맡았다. 몇 안 되는 소지품을 들고 있는 아이의 지친 표정과 슬픔에 잠긴 듯한 슬라브인 부모의 모습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당시에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림 속의 문구는 형식적일 뿐이다. 하지만 체코어를 쓰는 시민이라면 모두 애국심을 불태우며 이러한 문제를 인식할 수 있었다.
우리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이 그렇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통감부는 그전까지 선택과목이었던 일본어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실질적으로 조선어 교육 시간을 줄였다. 1930년에 들어서는 아예 민족 말살 통치를 시작하며 조선어 과목을 명목상 선택과목으로 지정하였다. 사실상 교육을 금지시킨 것이다. 심지어 1940년 8월에는 한글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폐간시켰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며 조선인들의 이름과 성을 빼앗기도 했다.
민족의 고유하고 아주 기본적인 '언어'조차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뼈아픈 현실. 비슷한 과거를 공유하는 민족이기에 무엇보다 와닿은 작품이었다.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전시회
해당 글에서는 무하의 배경과 민족주의 정신에 집중했다. 전시의 「Section 1. 뮤즈가 건넨 붓, 화가가 그린 전설」과 「Section 4. 슬라브의 화가」 부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전시회 자체는 무하의 다양한 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Section 2. 아르누보의 꽃」에서는 사람들이 무하에게 바라는 그림이 연달아 등장하며 기대를 충족시키고, 눈을 행복하게 만든다. 특히나 무하의 상업적인 작품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탈리아 비스킷 상자나 휘트먼 초콜릿, 와인, 향수 등이 있다. 상업예술과 순수미술의 사이에서 무하가 어떻게 줄타기를 했는지 구경하는 것은 흥미로운 과정이다. 의도적으로 그림에만 시선을 고정하며 어떤 제품을 광고하는 것인지 맞혀보고 이후에 작품명을 확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Section 3. 무하 오디세이」에서는 비교적 강렬하고 장엄한 작품들이 나타난다. 확실히 이전보다 민족적인 색채가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자신이 꿈꾸던 예술적 이상과 상업적 성공 사이에서 갈등하는 무하의 심리가 엿보이는 중요한 섹션이다. 「슬라브 서사시」를 향해 가는 정신적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르누보의 꽃 : 알폰스 무하 원화전」은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전시이다. 전시는 2025년 3월 20일부터 7월 13일까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이루어진다. 평일의 11시, 14시, 16시마다 정규 도슨트가 이루어지기도 하니, 무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싶다면 시간을 맞춰서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어찌 보면 봄은 여느 계절보다 강인하다. 한파를 뚫고 성큼 다가와서 만물을 녹이니, 해사한 겉모습이 다가 아닌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봄 내음을 가득 머금고 있다. 따뜻한 햇살 아래서 부드럽게 흔들리지만 꺾이지는 않는 화원 같다. 뿌리에는 단단한 민족주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새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요즘, 봄이 담긴 전시를 보며 다가오는 계절을 맞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