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방문하거나 이용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것만큼 아쉬운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보게 되곤 한다. 지역 개발의 이면에 남겨진 부작용은 기존에 자리잡고 있던 공간들을 위태롭게 만든다. 원서동에 위치한 인사미술공간(인미공) 역시 임대료 상승 등의 이유로 오는 6월을 끝으로 운영을 종료하게 되었다.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미니버스, 오르트 구름, ㄷ떨:안녕인사》 전시는 인사미술공간(인미공)의 25년 역사와 그 유산을 재조명하는 프로젝트이다. 인미공은 1999년 개관 이래 신진 작가 지원, 비평 활성화, 비제도적 예술 실험을 이어온 독립적 전시 공간으로, 본 전시는 그 성과를 현재적 시선으로 소환하고, 미래로 이어가는 과정을 시도한다. 세 명의 기획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인미공의 정신을 해석하며, 총 28인의 작가가 참여하여 다양한 매체와 접근법으로 응답하고 있다.
《미니버스》(기획: 권혁규) 섹션은 ‘소문자, 이동, 경유지, 경로’를 주요 키워드로 삼아 인미공의 유연하고 비제도적인 특성을 탐색한다.
권혁규는 인미공을 고정된 제도적 틀에 편입되지 않는 ‘소문자’적 존재로 바라보며, 이동성과 경로의 개념을 통해 예술적 실천의 자유로운 흐름을 제시한다. 특히 이러한 이동성은 공간적 특성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간 속에서도 이야기된다. 즉, 단순하고 선형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 영향을 깊게 주고받으며 동시에 존재함을 전시를 통해 드러낸다.
입구를 들어서면 ‘미니버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권오상의 작품 〈1800장으로 구성된 오류를 위한 오차〉(2001)가 보인다. 2001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던 권오상의 일명 ‘사진 조각’은 평면적이고 가벼운 사진과 입체적이고 무거운 조각 두 매체의 관계를 탐구한 작업물이다. 피사체의 작은 부분들을 담은 사진들을 모아 만든 조각의 표면은 완벽하게 매끈하지 않고 조금씩 어긋나 있다. 때문에 시차와 운동성이 강렬하게 내비친다.
그러한 운동성은 좌우 혹은 앞뒤로 왔다갔다 움직이는 김솔이의 키네틱 작업으로 옮겨간다.
김솔이의 〈둠 · 아나테마 · 이누이 (Doom · anathema · ennuyée)〉(2025)는 인미공창작소 프로젝트 Kula!(2020)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지 못했던 미완의 작업이 현재에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산업 폐기물처럼 보이는 조각은 비규칙적으로 작동하며, 그 옆 구조물에선 특정할 수 없는 소리가 재생된다. 급작스런 난청과 이명을 겪고 있는 작가의 경험이 작품의 움직임과 사운드를 통해 감각적으로 전달된다.
《오르트 구름》(기획: 김신재)은 영상 매체를 중심으로 인미공의 또 다른 정체성—아카이브와 기록—을 다룬다. ‘흩어진 혜성, 신호, 얼음조각, 씨앗의 운반’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전시는 기술 환경 속에서 기록이 어떻게 생성되고 소멸하는지를 탐구한다. 김규림, 이민지, 한우리 등 참여 작가들은 영상과 설치 작품을 통해 디지털 시대 아카이브의 불완전성과 그 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한다.
기록의 소멸과 생성이 반복되는 과정은 인미공이 지닌 비완결성의 미학을 상기시킨다.
김규림의 〈600분〉(2025)에선 고해상도 LED 패널과 16mm 필름 프로젝션이 마주보고 있다.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탄생한 두 매체는 아주 짧은 거리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다. 패널과 필름이 보여주는 대상은 램브란트의 〈야경〉(1642)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복원은 그 대상의 시간을 직접적으로 재구조화하는 작업이다. 대상이 지내온 시간의 흔적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과거를 존중하며 미래를 내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느 과학실에 들어온 듯한 황효덕의 〈머리가 헝클어져서〉(2025)는 보이저호를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보이저호에 실어져 외계로 보내진 골든레코드에 수록된 한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보이저호로부터 전파신호를 주고받으며 그것을 활용가능한 데이터로 변환시킨다.
작가는 이러한 가상의 흐름을 물질적인 차원으로 소환한다. 작업은 우주 공간을 보여주는 듯한 수조, 각종 광물 및 금속 오브제들, 안테나 형태의 구리 스피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록을 통해 저장하거나 교환하게 되는 정보의 물질적 특성을 생각하게끔 만든다.
《ㄷ떨:안녕인사》(기획: 김도희) 섹션은 인미공의 마지막 순간, 그리고 그로 인한 진동과 파장을 주제로 삼는다. 1970년대 한국 초기 미술 저널에서 영감을 받아 2023년 창간된 미술 저널 『ㄷ떨』의 번외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인미공과 크고 작은 관계를 맺어온 작가, 기획자는 물론 원서동 이웃들의 인터뷰도 책에 실었다. 전시장에 설치된 몇 점의 작품들과 인터뷰 영상은 인미공이 만들어온 시간의 작은 부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과거를 되짚으면서도, 그것을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재구성하려는 적극적인 시도이다. 기획자들은 인미공의 유산을 일방적으로 기념하거나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목소리’와 ‘떨림’을 통해 인미공이 열어놓았던 가능성들을 재가공한다. 이는 인미공의 정신 자체가 하나의 정체된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미니버스, 오르트 구름, ㄷ떨:안녕인사》는 인미공이라는 공간과 시간, 사람과 예술을 매개로 삼아 ‘기억’과 ‘미래’ 사이를 가로지른다. 이 전시는 비단 인미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동시대 예술이 제도와 비제도, 기록과 망각,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해야 할 긴장과 가능성에 대한 하나의 생생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그렇게 인미공은 ‘안녕’을 고하며 새로운 이동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