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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너영 나영, 두리둥실 놀고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어릴 적 할머니가 불러 주시던 제주 민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마을 사람들이 이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마음에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노래는 나를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속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의 할머니는 <너영나영>뿐만 아니라 제주 방언으로 된 여러 가지 노래들을 나에게 들려 주셨는데, 여전히 기억에 남는 노래 중엔 해녀들의 노래 <이어도사나>도 있다. 할머니는 민요와 전래 동화를 들려 주고, 생선 가시를 발라 주고,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주며 어린 나를 살뜰히 보살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당장 내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사랑을 말하기 쑥쓰럽다는 핑계로, 미안함은 표현하지 않아도 다 알 거라는 마음으로 소홀히 대했던 바로 곁의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을 비롯한 타인을 한껏 날이 선 태도로 대하기보다 포용하게 만드는 드라마. 16부작에 60여 년의 세월을 옹골지게 담아낸 드라마. 가족애를 이토록 진득히 다룬 드라마가 참 오랜만이라 시청하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었다. 마지막 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의 여운이 서린 감상평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나에게 이 드라마가 인상 깊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1. 마음에 콕 박히는 섬세한 내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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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무엇보다 내레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다. 문학 소녀 애순과 금명의 목소리로 흐르는 내레이션은 작품의 입소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 역시 SNS 피드에 끝없이 쏟아지는 함축적인 문장들을 통해 이 드라마의 첫 화를 시청하게 되었다. 덤덤한 목소리로 섬세하게 낭독되는 문장들은 아직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은 이들에게 작품의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엄마를 찌르면 내 가슴에도 똑같은 가시가 와서 박혔다.”

 

“소중한 이가 아침에 나갔던 문으로 매일 들어오는 것. 그건 매일의 기적이었네.”


“다른 사람을 대할 땐 연애편지 쓰듯 했다. 한 자, 한 자 배려하고 공들였다. 남은 한 번만 잘해줘도 세상에 없는 은인이 된다. 그런데 백만 번 고마운 은인에게는 낙서장 대하듯 했다. 말도 맘도 고르지 않고 튀어나왔다.”


“참 이상하게도,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전체 회차 몰아보기가 몰입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닌 작품 특성상, 매주 4편씩 순차적으로 공개되는 방식이 방영 기간 동안 내레이션이 널리 확산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주일 단위로 작품의 여운을 음미하며 마음에 박힌 내레이션과 감상을 각종 SNS로 나누었고,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드라마로 유입되며 입소문이 퍼졌다. 드라마의 결을 고려한 작품 공개 방식이 흥행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2. 시간의 흐름에 대한 공들인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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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60여 년의 긴 세월과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를 담아낸 작품인 만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자연스러운 연출이 돋보였다. 어린 애순과 관식이 시장에서 꾸준히 양배추를 팔았다는 사실은 같은 공간 속 계절의 변화로 나타난다. 계절별 장면은 각 1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디테일한 연출을 건너뛰지 않고 촘촘하게 보여준 덕분에, 바로 다음 장면에서 고등학생이 된 애순과 관식이 등장해도 시청자들은 훌쩍 지난 그들의 세월을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이후에도 어른이 된 애순과 관식, 어린이 애순과 관식의 모습을 계속 교차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서사가 전개되면서 이야기는 더 탄탄해지고 설득력이 강화된다.

 

짧은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연출력은 다른 장면에서도 두드러진다. 애순의 딸 금명과 영범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영범의 엄마 부용은 아들의 인생을 자신의 걸작으로 여기며 제 입맛대로 통제하려 한다. 결국 영범을 금명이 아닌 사람과 결혼시키는 일에 성공한 부용의 노년은 어두운 거실에서 쓸쓸하게 소파에 앉아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으로 요약된다. 이때 카메라의 앵글은 거실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 갇혀 있다. 부용의 고독한 뒷모습과 거실의 풍경을 반복적으로 회전해 비추며 시간의 흐름을 나타낸다. 마치 그것이 그가 고집한 인생의 결과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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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또한, 젊은 시절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던 상길은 세월이 흘러 아이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장년이 된다. 넘치는 에너지를 타인을 구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로 낭비했던 상길에게는 이제 힘이 없다. 허약한 몸으로 가족들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늦은 후회를 하는 상길의 모습 역시 시간의 흐름을 잘 보여준다.


반면 세월이 지나도 어떤 시절의 이미지는 마음에 각인된 것처럼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성인이 된 금명을 만나러 서울에 온 아빠 관식은 버스 터미널에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십 대 금명의 모습에서 어린 딸의 모습을 본다. 실제로 금명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빠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 어린 금명의 모습을 표현한 연출은,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을 통해 역으로 여지없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3. 투박하고 만연한 사랑에 대한 통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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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많은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가 자신의 삶과 마음을 대변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인물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일 것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투박하고 은근하게 드러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사랑, 과시하고 이해받고 인정받기 위한 사랑이 아닌 조용하게 지속되는 든든한 사랑. 이 작품은 각 인물들이 자기만의 최선으로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통해 '내가 사랑받는다고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했던 순간까지 사랑받고 있었음'을 알아채도록 만들어 준다.

 

애순의 할머니 춘옥에게 딸 애순을 챙겨 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광례, 이사를 가며 애순에게 도의적 장학금을 남기는 민옥, 애순 가족의 쌀독에 밤마다 몰래 쌀을 채워 넣는 집주인 할머니, 학씨 상길의 배에서 폭언과 폭행을 참고 일하며 그 사실을 애순에게 숨기는 무쇠 관식, 새벽마다 찹쌀떡과 메밀묵을 파는 은명 몰래 상길의 인맥을 동원해 아파트 사람들에게 돈을 돌리는 관식.


이들의 행동은 모두 투박하고 은근한 사랑의 모습이다. 어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힘겨움을 감추는 방식으로 발동된다. 그로 인해 오히려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 오히려 상대를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무거운 진실을 감당하면서, 사랑은 흔들리고 지속된다. 그렇게 자신이 모르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사랑이 만연하다는 진실을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알게 된다. 우리는 타인이 베푸는 애정의 총량을 절대로 가늠할 수 없으며, 누군가의 살뜰함이 계속해서 나를 살리고 있다는 진실.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고, 계속해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며 살아 간다는 메시지. 그 보편적인 이야기가 이 드라마를 더욱 빛나게 한다.

 

 

 

4. 일회성으로 소비되지 않는 입체적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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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캐릭터의 입체성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결코 한 장면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만 단순히 소비되지 않는다. 과거에 모르는 사람이 베푼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 기억을 마음에 잘 간직하고 살다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시 등장해 은혜를 갚는다. 이 드라마는 어려운 순간 누군가 베푼 선의에 대한 기억이 한 사람의 마음에 맺히고 발현되는 방식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연예인 미인은 삶을 포기하려 할 때 바다에서 자신을 구한 관식에게 목숨 값을 갚기 위해 '금은동이네' 가게에 방문해 오징어 회 홍보 영상을 촬영한다. 금명이 제니의 엄마 미향이 강요한 대리 시험을 거절한 뒤 그의 반지를 훔쳤다는 누명으로 경찰서에 가게 되었을 때, 그를 구해 준 제니의 집 가정부는 애순과 관식이 부산으로 야반도주를 했을 때 그들의 도움으로 여관 주인의 사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금명이 애순의 시를 모아 출판사로 보내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출판사의 편집장은 애순이 어린 시절 유채꽃밭에 던져버린 반지를 주웠던 어린 소녀다. 그는 광례의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광례가 환생해서 애순의 시집을 만드는 출판인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작품의 초중반에 풀어 놓은 인물과 이야기들을 후반부에 이르러 모두 깔끔히 매듭지으며 이야기를 풍성하게 마무리한다. 과거의 인연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우연이나 불가항력적인 작용에 의해 맞닿아 연결되는 방식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좋았다.


 

 

5. 그럼에도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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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충분히 잘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인이 된 금명의 인생을 좀 더 다각도로 보여 준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이다. 어른이 된 금명에게 벌어지는 핵심적인 사건은 영범과의 파혼, IMF로 인한 실직, 충섭과의 결혼으로 요약된다. 물론 각 사건은 모두 그 과정 속에서 가족들의 역할, 갈등,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에피소드다.

 

하지만 시청자로서 애순과 관식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란 금명이 성장해서 사회적으로 어떤 태도를 지닌 어른이 되었는지도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관계적인 역할뿐만 아닌, 금명이 어렵게 떠난 일본 유학 생활에서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공부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키우며 시간을 보냈는지, 직장 생활에서 상사나 동료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 인물이었는지 살필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 같다. 사회적인 맥락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금명만의 '요망진' 모습이 있었을 테고, 그런 장면을 통해 애순이 겹쳐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의 스토리에선 금명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 없이 단지 대기업에 다니다가 IMF로 실직한 이후 힘든 시기를 거쳐 사업 준비에 성공했다는 점 정도만 알 수 있다. 촘촘히 공들인 다른 장면들에 비해선 간략한 요약이다.

 

물론 사회적 측면의 에피소드를 생략하고 가족 관계의 측면에 몰입한 덕분에 가족의 성장 서사는 더욱 탄탄하게 쌓아 올릴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으로 금명이라는 개인의 면모가 평평해졌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런 아쉬움은 뒤로 한 채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존재를 애틋하게 여길 수 있었던 따뜻하고 뭉근한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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