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만나는 인상파의 시작과 끝, 그 혁신의 여정
일전에 모네를 통해 인상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보다 전문적으로 미술사를 다룬 책을 읽으려 도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랐고, 막상 이런저런 책을 뒤적이면 딱딱하고 어려운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 한 권으로 터너에서 모네, 고흐까지 다루면서도 동시에 비전공자인 일반인도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쉽고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상주의라는 물결 위에서 각자의 세계를 넓혀간 열여덟 명의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품에 담긴 뒷이야기부터 화가들의 삶에 나타난 고난과 스캔들, 감동과 사랑까지 인상주의의 처음과 끝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나간다. 더 나아가 인상파 화가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고민과 통찰까지 배울 수 있었다.
비전공자를 위한 재치있고 친절한 설명
‘한 권으로 읽는 인상파’를 일주일 만에 독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대화식 구성’ 덕분이었다. 유튜브 60만 구독자를 보유한 저자 고로는 자칫 어려울 수 있는 회화 기법이나 역사적 사건들을 어시스턴트(이하 어시)와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나간다. 고로와 어시의 대화를 물 흐르듯이 읽고 있으면 어느새 화가의 일대기와 그가 사용한 기법을 차근차근 이해해 나갈 수 있다.
거기에 풍부한 시각 자료와 도표를 바탕으로 예술뿐만 아니라 당대 역사적 사건과 흐름까지 탄탄한 교양을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이 책은 유럽 지역의 지도 및 프랑스 혁명의 역사 등 이해에 필요한 역사적 정보를 깔끔한 그림으로 제공하고 있다. 실제로 책에 삽입된 유럽 지도 그림을 바탕으로 부댕이 하늘과 바다의 경치를 많이 그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선명한 그림을 통해 유사한 대상을 각자의 스타일로 그린 예술가들의 그림을 동시에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인상주의 화풍은 빛과 색채에 집중하며, 순간적으로 눈에 비친 인상을 포착해 표현하는 화풍으로, 사실주의적인 그림만이 가치를 인정받던 당대 고전주의 그림과는 뚜렷한 차별점이 있었다. 인상주의는 필촉 분할 기법을 바탕으로 성장했는데, 이는 수채화처럼 물감을 직접 섞는 것이 아닌 서로 다른 색의 작은 붓 터치를 겹겹이 쌓으며 특유의 느낌을 자아내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인상'에 집중했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그려도 그 표현과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 Gustave Courbet, The Sea at Étretat, 1869, Musée d'Orsay.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예컨대 같은 에트르타의 바다를 용킨트, 쿠르베, 부댕, 모네가 그렸는데 용킨트는 하늘을 넓게 그렸고, 쿠르베는 절벽을, 부댕은 하늘을, 모네는 바다에 비친 노을을 특히 집중하여 그렸다. 위 작품은 쿠르베가 그린 에트르타의 바다이다. 네 작품을 한 페이지에서 비교하며 읽으니 각 화가의 특징이 뚜렷이 느껴졌고, 인상파가 추구하는 본질인 빛과 색채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각자의 삶, 각자의 예술
열여덟명의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녹아있는 이야기는 책의 두께만큼이나 방대할 것처럼 보이지만, 고로와 어시의 대화로 구성된 이 책은 핵심 내용을 압축적이고 흥미롭게 전달한다. 특히 한 화가당 평균 20장 이하의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어, 잠들기 전 한 명의 예술가 이야기를 선정해 차근차근 읽어나가기 좋았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인상파가 본격적으로 탄생하기 직전의 화가들을, 2부는 인상파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 활동했던 화가들을, 3부에서는 인상주의의 끝물에 탄생한 포스트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각 부마다 소개된 화가들이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흥미롭고 인상적이었던 예술가를 위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선 인상주의 화풍이 유명해지기 이전 시점에 활동한 화가 밀레는 우리에게 '농민 화가'로 익숙하다. 그러나 밀레는 사실 역사화를 더욱 선호했고, 역사 화가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는 사실은 꽤 의외였다. 실제로 그가 '농민 화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작품인 '키질하는 사람'은 원래대로라면 살롱전에서 퇴짜를 맞았어야 했지만, 당시 프랑스 내 혁명으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어 찬사를 받는 작품이 되었다.
때로는 원하는 방향이 아닌 전혀 다른 방향에서 세상의 반응이 오기도 한다. 밀레의 삶을 보며 이런 상황에선 나라도 역사화를 포기하는 일이 참 어려웠겠다 싶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방향으로 도전해 볼 만하다는 열린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프랑스 혁명과 관련한 자세한 설명은 '제2장 농민을 그리려는 의도가 없었던, 농민 화가 밀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Jean-François Millet, Le Vanneur, Musée d'Orsay.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2부에서는 본격적인 인상주의 화풍이 시작되면서, 다양한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모네의 '수련'에 담긴 연꽃의 의미 해석부터 드가의 그림에 담긴 은밀한 욕망, 필촉 분할의 한계점에서 고민하는 르누아르의 이야기 등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화가가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인상적이었지만, 2부에서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 화가는 모리조나 카사트와 같은 여성 인상주의 화가의 이야기였다. 카사트는 인상파의 이단아라고도 불렸던 드가를 끝까지 지지하며 그의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 드가를 만나기 전까진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을 여행하며 각종 회화 기법을 습득하기도 했다.
물론 부유한 집에서 자랐기에 훨씬 수월했을 경험들이겠지만, 그와 별개로 카사트라는 인물 자체가 상당히 끈질기고 인내심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모리조 역시 마네의 밑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한 화가였다. 비록 그녀의 사랑이 완성되진 못했지만, 이들이 그린 여성과 아이의 모습들은 인상주의의 확장에 기여했다.
▲ Mary Cassatt, Children Playing on the Beach, 1884, National Gallery of Art.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한편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은 사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화가였다는 반전있는 내용도 놀라웠다.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면 원근감이나 형태를 무시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부족한 점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고안했다. 원근법과 형태에 집중하기보다 이를 해체해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살려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현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불가능한 것에 목숨을 걸기보다, 가진 것 중에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을 발굴하고 다듬는 일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세잔의 이야기를 통해 삶에서의 선택과 판단, 집중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Paul Cézanne, Apples and Oranges, 1899, Musée d'Orsay.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외에도 모든 화가의 이야기가 한 명도 빠짐없이 흥미롭고 역동적이어서, 더 언급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역사상 최초의 개인전을 시원하게 열어버린 쿠르베나 아내와 아들에 관해 고뇌가 깊었던 마네의 이야기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18명의 예술가가 처한 상황과 삶에 대해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한편으로 책의 말미에 가며 모든 예술가는 각자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냥 평화롭기만 한 인물은 거의 없었다. 어떤 이는 찢어지게 가난해 삶을 관두고자 하기도 했다. 어떤 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살롱전에서 수십번 낙선했다. 각자의 삶에 각자의 고통이 녹아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방향으로든 계속해서 걸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돈을 벌기 위해 대중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며 세상과 타협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철학을 고수하며 더 혁신적인 화풍의 개발에 매진하기도 했다. 어떤 방식이든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예술을 이어갔다. 그만큼 그들에게 예술은 가장 절실한 무엇이었다.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뭉치며 전진한 인상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인정받는 화가가 되기까지 예술가가 들인 노력과 인내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의 삶에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그들의 끈끈한 네트워크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인상파 화가들도 결국 사람이기에 때로는 서로 다투기도 하고, 각자의 예술 철학이 대립하여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드가파와 모네파의 대립은 그들이 예술에 얼마나 큰 자부심을 가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그들을 달래가며 전시회 참여를 독려하거나 교류를 권한 피사로나 모리조 같은 화가가 없었다면 인상주의가 예술가들의 인정을 받기까지 좀 더 긴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 Georges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Art Institute of Chicago.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특히 피사로는 포스트 인상주의 시기 새롭게 등장한 점묘법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점묘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상황에서도 피사로는 이들이 인상주의 전시회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점묘법과 인상주의 기법은 비슷해 보이지만 과학적으로 차이가 있고, 완성된 그림의 분위기도 매우 다르다. 점묘법으로 그려진 그림은 인상주의 화풍에 비해 정적이고 지나치게 밝아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피사로는 동료들보다 비교적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인상주의라는 하나의 물결 안에서 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에피소드를 읽으면, 절로 마음이 따스해지며 ‘연대’의 힘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모작을 만들고, 존경하는 선배 화가를 따라 그리며 비슷한 화풍을 개척해 나가는 이들의 행보는 사람 사이에서 전이되는 에너지와 열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 Frédéric Bazille, Bazille's Studio, 1870, Musée d'Orsay.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런 점에서 바지유는 책을 덮어도 계속 생각나는 화가였다. 바지유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러 화가를 금전적으로 지원해 준 인물이다. 그가 없었다면 모네와 르누아르는 생계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바지유의 존재가 인상파에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비록 자신이 계획했던 인상파 전이 열리기도 전에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동료들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연결’의 가치를 크게 느낀다. 어릴 땐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함께 할 때만 이룰 수 있는 일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화가들은 각자의 역량도 뛰어났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자극받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하며 그들만의 영향력을 넓혀간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상호작용이 있었기에 ‘인상’만을 그린 화풍이라고 비난받던 시기를 딛고 한 시대를 풍미한 화풍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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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는 고전주의 화풍에 도전한 신선한 바람이자, 포스트 인상주의 탄생을 이끈 매력적인 흐름이었다. 열여덟 명의 화가가 품었던 이야기들은 저마다 너무도 흥미로웠다.
카메라의 등장과 같은 기술의 발달로 격변하는 사회에서, 인상주의는 빛과 색채에 집중하며 당대의 그림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기에도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인상주의를 꽃피웠고, 그 가치는 현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 Claude Monet, Impression, Sunrise, 1872, Musée Marmottan. (Image via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어쩌면 우리도 바로 그 격동의 시기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특정 화가의 화풍을 학습해 단 몇 초 만에 그림을 그려주는 AI 기술도 상용화되고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만의 고유한 예술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 가운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150년 전 인상파 화가들이 생각했던 바로 그 고민을, 지금의 우리도 여전히 해야 하는 건 아닐까. 단 한 권의 책으로 화가들의 일대기부터 세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인간의 방식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