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가 재연되었다. 2023년 초연된 이 연극은 라이브필름 퍼포먼스라는 독창적인 극형식을 가졌고, 이 형식은 5대의 카메라와 함께 이야기 속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끔 했다.
다양한 극의 장치들이 관객의 눈을 화려하게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집중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연극의 제목 그 자체에서 보이는 일제강점기의 내러티브였다. 또한 연극의 시놉시스에서 발견한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내용을 살펴봤다.
극 중 최영우의 직책인 포로감시원은 아직까지 제대로 조명되지 않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중 하나다. 이들은 일본군 소속으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 과정에서 다수의 포로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포로감시원 상당수가 연합군의 전범재판 후 B, C급 전범이 되거나 수십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일본군 소속이지만 정식 군인이 아닌 포로감시원이라는 신분, 일본인이 아닌 식민지인이라는 정체성, 미국, 영국 등의 서양인 포로 사이에서 경계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이 바로 포로감시원이었다.
이는 동명의 원작 소설인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의 저자인 최양현 영화감독의 할아버지인 최영우의 실화로 연극과 내용을 같이 한다.
실화 바탕의 문학이 연극이 되어 나타났을 때, 이야기는 다른 형식으로 감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양극단을 지시하는 이 연극에서 역사의 트라우마를 겪지 못한 세대의 나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까?
최영우는 서울에 상경하여 대학에 진학할 것을 기대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시기에 일본군에 징집되거나, 일제의 포로 감시원으로 복무해야만 했다. 죽음이 도사리는 전선 대신 그가 당시 전갈받은 내용으로는 '군무원'이었기에 일제의 대동아 공영권 중 하나였던 수마트라로 떠난다.
하지만 배로 이동하는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수마트라에 도착해서는 총칼로 군대식 훈련을 받는다. 이는 명백한 허위 공고이며 일제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침략하며 생긴 서양인 포로 문제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떠넘기기 위함이었다.
일제의 철도 건설과 같은 사업에 포로들은 강제 동원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가혹한 노동과 기아로 사망에 이르렀다. 최영우 또한 일본군의 상관에게 강압적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도 연합군의 재판에서 포로 감시원들은 자신들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재판대에 서 있기를 바라지만 폭력에 대한 결과로 그들은 BC급 전범이 된다. 이에 대해 충분한 진상 규범과 재소의 기회가 없이 다음 재판으로 넘어가 어떤 항소나 재소의 기회조차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은 가해자로서 책임을 물을 때에 '일본군'이라는 요구조건만이 성립될 뿐이었다. 이는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A급 전범들을 다루는 '도쿄재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당대의 일왕인 히로히토는 군국주의의 꼭두각시였다는 핑계로 처음부터 기소자 명단에서 빠졌다.
극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행되는데, 재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100년 전에서는 억울함과 답답함, 그러면서도 지우지 못하는 죄책감이, 현대에서는 의구심을 포함한 탐정과 같은 자세가 눈에 띄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를 알기 위해선 양쪽의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이는 비슷한 경계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겐 더욱더 어려운 것이다.
최영우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집단을 대표하는 이들이 폭력을 행사하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의 생겨나는 국가 폭력 피해자들을. 이를 극을 통해 전달받으며 체험하지 못한 세대지만 그들을 언외적인 것으로 또한 경험해 보려는 시도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