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림의 모티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비슷한 느낌의 작업을 한동안 진행해온 탓인 것 같은데요. 그림이 한 단계 나아가기 위해, 그리고 내용적으로 보충하고 영감을 얻기 위해 여러 종류의 책을 읽고, 드로잉을 많이 해보는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신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드로잉들
너무 공을 들이기보다는
색연필의 선을 느낌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참고하고 있는 것들은 신화입니다. 제 또래들이 많이들 그러했듯이, 저 역시 만화로 그려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며 자랐던 기억이 납니다. 권선징악 등, 무조건 선한 주제만을 다루지 않았던 동시에 인물들 또한 다채로워서 더욱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앞선 그림을 보고 눈치 채신 분들도 있으실 것 같지만, '판도라의 상자'를 모티프로 그린 드로잉들이 꽤 많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열어본 판도라 등 어떠한 이유로든 금지된 것들을 행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제게 묘한 해방감을 안겨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의 작업 세계관은 주로 '길을 잃은 여성들'로 키워드화 되어왔기에 개척되지 않은 길을(설령 그것이 가서는 안 되었던 길이더라도) 개척하고, 그 쪽 여성들의 이미지가 특별히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신화를 모티프로 한 다른 그림들
주로 테세우스 신화나,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이야기 등
영웅화된 남성 서사를 빌려왔다
또한, 여성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만큼 기존에 있던 남성들의 신화를 가져오되, 그것을 여성의 것으로 전복시키고자 하는 시도도 종종 해보았습니다. 드로잉 상에서는 단순히 남성의 이미지를 여성으로 바꾼 것이 전부이지만, 기존에 즐겁게 읽었던 신화들을 재해석해 제 나름의 그림 스타일로 풀어내는 것이 즐거웠던 기억이 납니다. 여담을 덧붙이자면, 저의 개인 섹션, 'Labyrinth'도 테세우스 신화 속의 미궁에서 따온 것인데요. 미로를 뜻하는 또다른 단어, 'Maze'와 또 다른 점은, 전자의 경우 빙빙 돌아 결국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는, 탈출구가 따로 있는 후자의 단어와는 조금 다른 뜻이라고 합니다. 테세우스의 신화처럼, 미궁 속의 괴물을 쓰러뜨려야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작업을 하는 일도, 이것과 제법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속에서 나 스스로와 싸우며, 스스로와 작업을 붙들어두는 무언가를 쓰러뜨려야만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최근에는 작업적인 고민에 빠져 끝이 없는 길을 걸어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그 길을 헤쳐나가는 것이겠지요? 글을 읽으시는 분들 또한 자신만의 미궁이 있다면, 지치지 않고 끝까지 그곳을 빠져나오길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