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봄의 끝에서, 선생님께

글 입력 2024.04.30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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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선생님. 4월이 끝나가니 세상이 완전히 녹은 듯합니다. 날도 따뜻하고 햇빛이 따스워서 그런지, 마음이 풀리는 기분입니다. 아무런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봄을 즐기는 건 사람으로서 제 할 일을 하는 것 같달까요. 인제 1년에 얼마 없는 날이기도 하고, 큰 근심 없이 여유를 부릴 줄 아는 것 같으니 되려 부러울 뿐 무어라 할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봄에 가장 많다고 합니다. 참으로 잔인한 계절입니다. 우는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을 흑백처럼 갈라놓는 날씨입니다. 비참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빠는 여전히 타지에 있습니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고, 집 주변에 괜찮은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에 알맞다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했고, 만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긴 했는데 길게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한국에는 언제 오냐 물었더니 모르겠다고만 하더군요. 돈을 많이 벌어 오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 뒤로는 연락이 없습니다. 전처럼 엽서를 좀 보내올 뿐이고요. 제가 최근 이사해 바뀐 주소를 적어 답장을 보냈더니, 다행이라는 한마디만 되돌아왔습니다. 바닷가 사진이 출력된 엽서였는데,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어요. 사진 속 짙게 푸른 바다가 이뻤습니다. 지난달엔 저도 바다에 다녀왔습니다. 윤이 기일이어서요.


저번 편지 부쳤을 적보다는 많이 맥을 차렸습니다. 윤이가 자꾸 꿈에 나와 혼을 내서요. 다시 일도 시작했고, 시간 나면 시도 읽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이 상을 탔다는 소식에 기분이 좋은 날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책장에 꽂혀있는 시집들을 보며 무슨 재미로 저런 글들을 읽는 건지 아리송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맨드라미가 나오는 문장들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화분 키울 품도 생겼습니다. 저번엔 화분 하나에 벌레가 들어 잎이 다 졌는데, 잘 아시잖아요. 아무리 이울었다고 해도 버리기는 영 쉽지 않아서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도 주고 영양제도 주었더니 새 이파리가 났습니다. 기분이 퍽 좋아 웃음도 났습니다. 용케 버텨 살아냈다는 걸 알게 되니 아침마다 화분에 시선이 갑니다. 이렇게 기대하면 안 될 텐데요. 뭐든 기대하는 건 피하던 성질도 여전해서.... 웬만하면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렇다고 무관심하게 두면 정말 떠나보낼 수도 있으니 적당히 신경 쓰려고 합니다.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볕이 나름 잘 드는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이사 준비하면서 벽에 붙어있던 윤의 사진을 떼는 게 제일 힘들었는데, 한번 앨범에 넣고 나니 생각보다 자주 펼쳐보지 않는 듯합니다. 윤이 서운하다고 해도 할 말 없을 정도로요. 꿈에서 보아 그런지 굳이 사진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얼굴이 잊히진 않는 것 같습니다. 뭐가 됐든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앨범은 한번 펼치면 닫기가 워낙 힘들더라고요.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도 못해 같은 사진들만 한참을 보는데, 그러고 나면 다음 날 일할 때 잠이 너무 와서 힘이 듭니다. 윤은 여러모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 데에 천재가 있는 듯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닌데요. 하여간 볕이 잘 들어 화초도 키우고, 창가에서 책도 읽고 그럽니다. 햇볕에 의지해 글을 읽다 보면 잘 사는 듯한 기분도 들곤 합니다. TV도 새로 사서, 조용한 노래를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다 보면 꽤 나른하고 여유롭습니다. 대화가 없으니 적막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버티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 한가운데에는 공동묘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긴 벚꽃이 아주 유명합니다. 하도 유명해서 한번 보러 가려다가 말았습니다. 괜히 시샘이 나서요. 묘가 많은 곳이잖아요. 묘가 있다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떠난 사람을 다시 볼 수는 없더라도 그곳에 계속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 앞에서 ‘기다리느라 외로웠지’, ‘혼자 있느라 심심했지’, 혹은 ‘오랜만에 보러 왔어’ 따위의 말을 하는 걸 들으면 질투가 날 것만 같았습니다. 벚꽃을 보러 간 사람들이 많겠지만, 떠난 사람을 보러 간 사람들도 많을 것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나른할 만큼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잊지 못하겠는 사람과 함께 꽃을 보는 거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어서요. 그래서 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주소가 잘못되었는지 저번에 회신을 받지 못해서요. 궁금합니다. 직접 찾아뵙지 못하는 건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간솔하게 말씀드리자면, 나이가 가늠되지 않을 만큼 두껍던, 그 당나무만 보아도 힘이 빠질 것 같습니다. 오빠랑 현이랑 선생님이랑 말갛게 웃던 날들에 비해 지금은 영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올해 안에는 꼭 찾아뵙겠습니다. 조은슈퍼랑 선희 이모네 미용실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정말인지 아직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네요. 아, 이 소식은 나연이를 통해 들었습니다. 영어학원 선생님 딸 나연이요. 기억하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머리 땋는 걸 좋아했던 아인데, 저번에 어쩌다가 같이 커피를 마셨거든요. 성격이 좋긴 했는데 아직도 아이들이랑 자주 만나나 봅니다. 소식통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습니다. 저는 현이랑 오빠 소식 말고는 전해줄 근황이 없었지만요.


오늘도 처음 쓰기 시작한 마음과 다르게 명랑하지 못한 이야기들만 늘어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들만 늘어놓으려 한 것이 아닌데요. 아무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말린 작약 꽃잎을 동봉합니다. 저번에 집 앞에 꽃시장이 열렸길래 작약 두 줄기를 샀었는데, 꽃송이가 워낙 어여뻐야지요. 꽃의 시체를 걸어두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아 말린 꽃에는 눈도 잘 가지 않고 사본 적도 없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말리고 있었습니다. 눈에 아주 꼭 듭니다. 아무렴 어떠한가, 이쁘면 그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고요. 코팅하여 책갈피로 쓰니 여간 이쁘지 않습니다. 네 장을 보냅니다.


횡설수설하였는데, 용서해 주시고 이번에는 꼭 회신을 받고 싶습니다. 부디 안녕하셔야 합니다.

 

*

 

덧. 사실 요즘 제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거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웃는 게 이쁜 사람인데 제 속이 아직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을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자꾸만 윤이랑 비슷한 구석을 찾게 되어서요. 닮은 모습을 보지 못하는 날이면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가끔 주저스러운 마음도 드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이면 아무런 꿈도 꾸지 않습니다. 되려 꿈에 나오질 않아 삐진 게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민망하지만 선생님께만 말씀드리는 제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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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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