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타인의 삶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운 영혼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글 입력 2024.02.13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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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인간을 말하는 서사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가장 현재적이며, 수없이 변용되면서도 낡아 떨어져 버리지 않는 테마가 한 가지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를 수밖에 없기에, 손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문득 깨달으면 은하수 건너에 있는 듯 멀기만 한 타자와의 랑데부를 그리는 서사는 늘 근원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그리고 제목부터 그 테마를 정직하게 받아 적고 있는 영화가 한 편 있다. <타인의 삶>은 인물 설정과 사건 전개가 서독과 동독이 대립하는 역사적 배경의 특수성에 크게 기대고 있지만, 역사를 관통하는 인류 보편적인 질문에 대해 우회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직설적으로 답하는 영화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는가?

내가 그를 이해하고, 그가 나를 이해하여, 서로의 세계가 교차하고 어쩌면 공존을 이룰 수 있는가?

 

이 오래되고도 늘 지금, 이 순간 당면하게 되는 질문에 <타인의 삶>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영화는 동독의 학교에서 장래의 슈타지 비밀경찰에게 심문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주인공 비즐러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퀀스로 시작된다. 그가 과거에 직접 혐의자를 압박하여 자백을 받아 낸 상황이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하고 멈추면서 화면은 취조실에서 있었던 상황과 현재 강의실의 상황을 오간다. 혐의자가 울먹이며 어떤 이름을 내뱉는 소리에 웅성이는 학생들에게 그는 어떤 소리를 끝까지 잘 들어보라고 지시한다. 함께 귀 기울이는 관객에게 경비견에게 체취를 기억하게 할 목적으로 유리병에 혐의자가 앉아있었던 방석을 넣고 밀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비즐러는 말한다. "상대가 사회주의의 적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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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즐러는 비밀경찰로서 시민을 감시하기 위해 도청이라는 수단을 주로 쓴다. 영화 내내 그는 '타인의 삶'을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으레 그러듯 관객도 '타인의 삶'의 청취에 집중할 것을 종용하고는, 한 인격을 유리병에 가두어 수집해 버리는 소리를 들려줬다. 똑같이 생긴 작은 유리병들 중 하나. 경비견 체취 샘플은 슈타지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주의의 적”에 대한 비인격화를 은유하는 메타포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모습으로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는 비즐러는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동독의 악명 높은 슈타지 비밀경찰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계속 지켜보면, 비즐러는 생각보다 특출나게 악마적인 인물이 아니다. 비즐러의 집을 느리게 패닝하며 보여주는 장면을 살펴보자. 집에는 비즐러의 기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식, 물건 따위가 없고, 비즐러가 내내 차가운 느낌을 주는 회색 상의만을 입고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조로운 색으로 채워져 있다. 수직, 수평적인 분할이 반복되는 가구의 배치들은 경직된 느낌을 준다. 또한 집에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저녁을 간단히 준비해 TV 앞에서 먹는 그의 귀가 후 일상은 현관에서 거실로, 오른쪽으로 느리게 패닝하는 쇼트, 그리고 다시 부엌에서 거실로, 왼쪽으로 느리게 패닝하는 쇼트, 단 두 개의 정적인 쇼트로 표현되고 있으며, 고요한 집에는 비즐러가 틀어놓은 TV에서 들려오는 동독 정부의 행정에 대한 뉴스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무미건조하고 텅 빈 삶일 뿐이다.

 

또 다른 비즐러의 공간이 있다. 감시 대상인 드라이만의 거주지 위층의, 앞으로 도청하는 공간으로 계속 등장할 공실을 비즐러가 처음으로 확인하는 롱 쇼트는 비즐러의 세계의 조감도이다. 이 쇼트는 광각 렌즈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로 인해 깊이감이 과장된 공간 안쪽 멀리에 인물을 배치하여 더욱 멀고 작아 보이게 했으며, 또한 나무 기둥으로 격자처럼 잘게 쪼개진 공간 사이에 그를 위치시켰다. 넓고 텅 빈 전체 공간에 비해 협소하게 제한된 공간에 갇힌 왜소한 모습은 억압적인 동독 사회에 깊이 배태되었으나, 자유를 제한당하고 인격적인 교류가 단절된 인물을 은유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수평, 수직 분할이 두드러지는 차가운 색감의 공간에 홀로 갇혀 있는 듯이 배치된 비즐러의 단독 쇼트가 유사하게 반복된다. 그의 세계에 적을 섬멸하겠다는 투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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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색채가 가득한 세계에 사는 인물이 있다. ‘사상 문제’로 비즐러의 감시 대상이 된 극작가 드라이만이다. 비즐러의 정적인 세계를 드러내는 시퀀스 바로 다음에 붙어 카메라는 대조적으로 빠르고 어지럽게 오가며 아이들과 길에서 공놀이하는 드라이만을 쫓는다. 공을 쫓아가는 발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수선스럽다. 드라이만의 집은 그가 자주 입고 있는 따뜻한 느낌의 베이지, 갈색 의상과 어우러지는 다양한 온화한 색감과 장식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그가 좋아하고 아낄 것이라고 짐작되는 물건들이 곳곳에 가득 널려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만하게 교류하고, 예술적인 열정이 일상을 다채롭게 해주는 드라이만의 삶이 드라이만의 공간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정반대의 두 인물은 이야기가 진행되며 불균형한 관계를 형성한다. 비즐러만이 드라이만의 존재를 안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선의 권력을 지녔다. 그런데 온기와 색채를 두른 드라이만의 세계에 비하면 비즐러의 세계는 그림자처럼 납작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까?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세계에 물들기 시작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그의 연인을 끌어안는 것과 꼭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드라이만의 집에서 브레히트의 시집을 훔쳐 나와 시에서 위안을 찾기도 한다. 비즐러의 공허한 세계에 사랑과 예술이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사한 행동을 하는 비즐러와 드라이만의 단독 쇼트가 연속해서 나오는 경우는 이후 계속 반복된다. 줄거리의 중심에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것은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 맞는 위기와 체제에 대한 저항이지만, 그보다도 공을 들여 그려지는 것은 드라이만의 저항에 내적으로 동조하며 변화하는 비즐러의 세계다. 특히 드라이만의 집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시퀀스 중 비슷한 구도로 마주 보고 있는 듯 배치된 두 인물을 느린 일정한 속도로 왼쪽으로 패닝하는 카메라 움직임으로 각각 촬영한 두 단독 미디엄 쇼트를 연결하며, 각 쇼트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드라이만이 집필한 글을 타자기로 입력하는 쇼트와 비즐러가 드라이만을 보호하기 위해 꾸며낸 보고서의 내용을 타자기로 입력하는 쇼트가 붙은 장면에 이르러서는, 비즐러는 이제 드라이만의 거울상과도 같이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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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세계가 교차하는 사건은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동·서독 통일 이후에야 일어난다. 드라이만이 우연히 자신의 혐의를 은폐해 준 비밀경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이다. 드라이만은 비즐러가 자신에게 그랬듯 그를 몰래 찾아가 그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뒤, 비즐러가 서점에서 드라이만이 자신에게 헌정한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저를 위한 책”이라며 구매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책의 제목은 과거에 드라이만이 연주하는 장면이 나왔던 소나타에서 따온 것이다. 드라이만은 존경하는 스승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그에게서 선물 받았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를 연주하며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질문을 던진다. “이 곡을 듣고도, 진심으로 듣는다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모호한 말은 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사무친다.

 

1. ‘예르스카(스승)와 같이 존경받아 마땅한 작품을 남긴 사람을, 그가 빚어낸 아름다운 세계를 정말로 이해한다면, 그가 작품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손발을 잘라내 그의 영혼을 죽이는 일을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런 불가해한 일이 동독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드라이만은 탄식한다.

 

2. 드라이만의 뒤에 서서 연주를 듣고 있던 그의 연인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생각한다. ‘예술적인 열정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진정 가지고 있다면, 그를 추구하기 위해 타락한 권력에 타협하고 말 수 있겠는가? 그것을 어찌 예술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3. 마지막으로 도청 장치 너머로 연주를 듣고 있는 비즐러에게 건네진 질문은, 곧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다. 비즐러가 오프닝 시퀀스에서 ‘타인의 삶’을 제멋대로 쥐어짜 내어 작은 유리병에 수집한 것과는 달리, ‘‘타인의 삶’에 어떠한 사랑과 열정이 담겨있는지 제대로 귀를 기울여 진심으로 듣는다면, 그런데도 그 삶의 ‘아름다운 영혼’을 감히 닮아 아름다워지길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나타를 들으며 비즐러가 흘렸던 눈물은 마지막 질문에 대해 이미 답하고 있다. 드라이만의 삶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된 비즐러는 그의 사랑과 열정의 아름다움을 수호하고, 자신도 그러한 영혼을 가질 수 있기를 염원하게 됐다.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 연주와 느리게 패닝하여 눈물이 흘러내리는 순간을 기다리는 쇼트를 결합한 몽타주는 한 사람의 세계가 뒤바뀌는 순간을 지긋이 바라보며 관객 또한 타인의 삶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청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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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라는 소품은 타자와의 화해에 대한 메타포로서, 영화의 중심 질문에 대한 감독의 희망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타인의 삶’에 대해 귀 기울여 듣고자 할 때,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영혼’을 마주할 수 있다는 관점은 비인격화의 추동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역사적인 실험을 통해 인류가 이미 알고 있는 바에 비해 지나치게 낙천적이다. 하지만 이는 몽매에서 비롯된 낙천이 아니라, 그런데도 포기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의지에 가까운 낙천으로 보인다.

 

앞서 반복해서 나온 광각 렌즈로 일렬로 끝없이 늘어선 슈타지의 보고서를 담아낸 롱 쇼트에서 읽히는 것은 효율화된 비인격화에 대한 메타포였다. 그런데도, 음악 한 곡, 책 한 권을 통해 구원하고 구원받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지고 있는 도덕적 의무에 대한 정언 명령을 시적으로 풀어낸 영화의 메시지로 말미암아 누군가는 비인격화의 추동에 저항하는 낙천적인 의지를 키워나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순진해 빠진 희망이라고 해도 그렇게 이 영화가 어떤 사람의 <아름다운 영혼을 위한 소나타>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영화를 보게 된다면 질문을 곱씹어 보길 바란다.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러한 이해를 통해 충돌하는 세계들이 평온하게 공존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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