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2악장 [음악/클래식]

스탈린 공포 정치 시기의 피아노 '전쟁 소나타'
글 입력 2023.11.1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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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에프.jpg

 

 

프로코피예프는 근현대 클래식을 대표하는 러시아 작곡가이다.

 

그는 공포 정치 시기에 망명하여 미국에서 4년, 파리에서는 12년을 보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3년 전인 1936년에 다시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프로코피예프는 소련 체제 순응자로 불린다. 혁신적인 음악 스타일을 추구하던 그 또한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의 정치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 영향으로 작곡도 보수적으로 변했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프로코피예프는 20세기 피아노 레퍼토리 확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피아노 분야에서만큼은 당 시대에 그 어떤 누구도 그와 필적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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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는 총 9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그중 6, 7, 8번을 묶어서 ‘전쟁 소나타’라고 부른다.

 

7번은 역사적 의미가 대단한, ‘전쟁 소나타’ 중 가장 짧고 난해한 곡이다. 독일군 침략에 대한 공포와 스탈린 시대 러시아의 불안감을 그려냈다. 제2차 세계 대전을 직접 겪으며 작곡하였다.

 

이 시기 대다수의 음악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전쟁 소나타는 몇 안 되는 절대음악(음악 자체에 의미를 두는 순수음악)이었다. 덕분에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음악에 담아낼 수 있었으며, 스탈린을 비판하는 내용도 소나타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프로코피예프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참고하여 소나타를 만들었다. 프로코피예프만의 개성이 도드라진 소나타는 리스트의 비르투오소적 기교와 라벨의 피아노 언어가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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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은 1943년 1월 18일 모스크바에서 피아니스트 리히테르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프로코피예프는 이 곡을 그에게 헌정할 정도로 리히테르의 연주를 마음에 들어 했다. 작곡가의 인정은 리히테르에게 엄청난 자부심과 사명감을 안겨주었다.

 

피아니스트 폴리니의 연주 또한 프로코피예프의 인정을 받았다.

 


 

 

느린 2악장에서는 도시의 차가움과 낭만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우주를 떠도는 듯한 공간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다.

 

2악장은 슈만의 연가곡 「Liederkreis」의 9번째 곡 “Wehmuth(슬픔)”에서 선율과 주제를 빌려왔다.

 

클라이맥스에서는 죽음을 알리는 듯한, 정신없는 날카로운 종소리들이 묘사된다.

 

I can sometimes sing as if I were glad, yet secretly tears well and so free my heart. (기쁘듯 노래를 부르지만, 뒤에서는 몰래 눈물을 훔친다.) (...) Everyone delights, yet no one feels the pain, the deep sorrow in the song. (모두가 즐거워 보인다. 곡의 슬픈 선율에 공감하는 이가 없다.)

 


[한재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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