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엽서에 얽힌 기억 [문화 전반]

엽서 뒷면 공백을 채우며
글 입력 2023.08.04 07:4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엽서에 대한 단상


 

KakaoTalk_20230803_235027166_01.jpg

 

  

기록이 좋다. 잠이 몰려와도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당장 메모지를 꺼내 적어야 직성이 풀리고, 구름의 모양새를 곱씹고 싶어 구름을 찍어둔다. 그리고 특정한 수취인에게 편지를 써야 할 때는 엽서를 떠올린다. 내 문장으로 쓸 수 없을 것 같은 말을 엽서의 일러스트나 사진으로 마저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엽서, 존재감을 선명히 드러내는 앞면과 흰색 공백의 뒷면.


엽서의 뒷면이 앞면만큼 강렬한 존재감을 지니려면 뒷면은 온통 글자로 채워야 한다. 내용 없는 엽서는 앞면만이 주인공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로 가득 채운 엽서는 조금 다르다. 아마 뒷면에 시선을 뗄 수 없을 것이다. 조그마한 엽서에 꾹꾹 눌러 담은 글씨가 언제 넘쳐흐를지도 몰라 긴장하는 맛도 있지 않을까.

 

가끔은 엽서를 꺼내보며 웃을 수도 있을 테다.

 

 

 

엽서 뒷면을 빼곡히 채우려면 


 

20230803_엽서_본문.jpg

 

  

작년 겨울 12월 말이었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엽서를 꽤 많이 샀었다. 본가로 내려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을 최대한 쪼개서 편지를 써야만 했었다. 낮에는 해야 할 일을 쳐내고 새벽에는 편지를 썼는데도 시간이 부족해서 그다음부터는 아예 첩보 작전을 수행했던 기억이 난다.


일명 커튼 작전, 사람이 가득한 파티룸에서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편지 두 통을 무사히 써낼 것. 이미 써온 편지 두 통을 조용히 전달하고 오는 것도 포함이었다.


그러하다. 나는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아지트 찾기에 나섰고, 사람들이 제각기 흩어질 즈음 커튼 뒤로 쏜살같이 튀어가 편지를 썼다. 누가 커튼을 홱 젖히고 들어올까 가슴 졸였지만, 다행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 마지막 편지의 마침표까지 제대로 찍을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쓰기는 했지만, 다음에 또 보자는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당신들을 언젠가 다시 보고 싶다는 기약 없는 말보다는 따로 연락해서 보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까.


수신인 한 명 한 명에게 느꼈던 감정을 엽서에 담아 보내고자 애썼다. 자꾸만 위로 날아가는 글씨를 붙잡기 위해 말을 고르고 골랐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는 나도 정의하지 못하는 감정의 편린을 아주 조그맣게 끼워 넣었다. 돋보기로는 보이지 않을 거다. 절대로.


아무튼,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사실 편지를 쓰는 것보다 얼굴 보고 직접 전하는 것이 더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조용히 전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과 제법 잘 어울릴 엽서에 편지를 쓰고 싶어 아끼는 엽서 몇 장을 쓴 건 비밀 아닌 비밀이다.


8월이 되자마자 전시회에 가서 엽서 한 무더기를 사 왔다.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라는 이유가 컸지만, 작년에 편지를 쓰지 못해 미안했던 사람들이 떠올라서다.

 

언젠가 사람마다 떠오르는 계절이 있다고 말한 기억이 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머무르는 계절에 편지를 남기고 와야겠다.

 

 

 

이유빈.jpg

 

 

[이유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