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들이 프레임에 부딪히는 방법 [만화]

글 입력 2024.01.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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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돈, 자유, 사회적 명예, 사랑] 중에 하나씩 버려야 한다면 뭐부터 버릴 거야?”

 

얼마 전 트위터에서 유행하던 질문을 던지는 친구였다.

 

“흠.. 오랜만의 황금밸런스 질문이네. 니는?”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돈부터 버릴 듯.”

 

“오 나도.”

 

역시 친구는 나와 비슷하군, 싶었다.

 

대화가 끝나고 가장 마지막에 버릴 것을 고민해보았다. 우선 돈 다음으로는 사회적 명예를 버릴 거고, 그다음으로는 사랑, 가장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유를 버릴 것 같았다. ‘결국엔 사랑이 이긴다’라고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지원서에 버젓이 적어 놨음에도, 그럼에도 자유는 사랑보다 한 단계 위에 놓였다. 자유롭지 않다면 사랑조차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그 근거였다. 그만큼 나에게 자유는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 사회의 일원인 나는 그 자유가 최소한의 선에서는 지켜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만약, 내 자유의지가 통째로 부정된다면 어떨까. 만약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이 모두 틀 속에 갇힌 가짜 속의 세상이고, 누군가 내 삶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나는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듯했으나 결국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웹툰 <다섯번째 벽>



킬링 타임용 웹툰이 취향이라면 가장 마지막에 봐야 할 웹툰이 바로 김승원 작가의 <다섯번째 벽>이라고 하겠다. 그만큼 본 작품은 설정부터 복잡하고 어려워서 몰입과 집중 없이는 플롯을 이해하는 능동적 독서가 불가능하다. 아래에 간략히 설정을 정리해볼 텐데 머리 아프기 싫은 독자는 뛰어넘어도 무관하다.


<다섯번째 벽>에는 네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1) [H와 J의 세계], 2) [현정과 정현의 세계], 3) [현정과 승원의 세계], 4) [S와 N의 세계]. 아직 완결이 나지 않아 캐릭터의 이름조차 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께끼 투성이지만 작가의 트릭에 따라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 번째 [현정과 승원의 세계]에서 승원은 만화가이고, 두 번째 [현정과 정현의 세계]를 창작했다. 승원과 만난 현정은 웹툰 PD인데, 승원이 그려낸 [현정과 정현의 세계]속 현정이 자신의 어린 시절과 너무 똑같아 [현정과 정현의 세계]의 현정과 동일인물이라고 두 사람 모두 확신하게 된다. 첫 번째 [H와 J의 세계]는 승원이 그려낸 [현정과 정현의 세계]에서 정현이 그리는 만화다. J는 자신의 세계가 만화라고 믿는 캐릭터로, 정현에 의해 자살이라는 결말이 정해져 있으며 H는 J를 설득시켜 자살을 막고자 한다. [S와 N의 세계]는 이후 17화에서 ‘김승원의 망상’이라고 밝혀지며 나머지 세 개의 세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커플이 등장한다.

 

다섯번째 벽 (2).png



즉, [현정과 승원의 세계]에서 [현정과 정현의 세계]가 연재되고, [현정과 정현의 세계]에서 [H와 J의 세계]가 연재되며 [S와 N의 세계]는 이 전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이 모든 세계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H와 J의 세계]에서 J가 ‘이 세계는 만화다’라고 믿기 시작하며 일어난다. 정현은 자신의 스토리의 영감을 받기 위해 현정이라면 어떻게 J를 설득시킬지 얘기해보자며 상담을 신청하고, 현정은 J와 정현을 동일시하며 그를 논리적으로 굴복시키고자 한다. 현정은 결국 정현을 이기는 데 성공하지만, 승원이 계획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정현은 자살한다. 

 



영화 <트루먼쇼>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쇼>는 실제 사람을 만화 같은 프레임에 가두는 설정에서부터 시작한다. 태아일 때부터 선택된 트루먼은 30년 동안 그의 일생이 매일같이 TV 리얼리티 쇼로 생중계된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세트장이었고 부모와 아내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방송국의 지시를 받는 연기자였다. 

 

 

트루먼쇼 (1).jpg

 


영화 도입부부터 시리우스 별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조명이 떨어진다. 아내는 마치 광고라도 찍듯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제품의 장점을 읊어대고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길거리 방랑자가 되어서 나타난다. 점차 트루먼은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섬을 떠나 피지로 향하고자 하는 트루먼이 겹겹이 쌓이는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저지되자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다. 결국 트루먼은 불확실한 관찰자이자 전지적 인물인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격렬한 사투 끝에 세트장의 문을 열고 나가는 데 성공한다. 


<트루먼쇼>는 이러한 독특한 설정을 특유의 카메라 연출로 극대화했다. 화면 네 모서리부터 까맣게 처리하는 비네팅을 활용해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은 소형카메라로 촬영된 화면임을 드러내거나 카메라가 갑작스럽게 인물을 따라 빠르게 패닝하는 등 영화보다는 TV쇼에서 많이 활용된 카메라 워크를 활용했다. 특히 트루먼을 제외한 배우들의 PPL 장면에서 렌즈를 정확히 응시하는 장면에서 제4의 벽을 깨면서 영화 관객까지도 '트루먼쇼'를 시청하는 ‘관음객’으로 만든다. 영화 속 등장하는 '트루먼쇼'의 시청자들처럼 우리는 트루먼의 일상을 지켜보고 감동하고 기뻐한다. 


 

 

그들이 프레임에 부딪히는 방법



생각할 지점이 많은 작품들이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인물들이 프레임에 부딪히는 방법이었다. 


[현정과 정현의 세계]에서 정현이자 [H와 J의 세계]에서 J는 자유가 없다고 믿기 시작한 시점부터 삶의 의욕을 잃었다. 프레임을 자각하고 보이지 않는 벽 너머의 누군가를 상정했지만 그 프레임을 깨기보다 자신을 스스로 망치질했다. 내 생각은 가짜고 어차피 나의 자유, 나의 의지란 허울이다.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대변하는 것뿐이고 지금 내가 뱉는 이 말도 왼쪽 위의 말풍선으로 표시되겠지. 이런 식의 허무주의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왜 J가 죽어야만 하냐는 현정과 H의 끈질긴 질문에 결국 ‘학교폭력’이라는 편리한 소재를 꺼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낸다. 이미 정해져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정현과 J는 자살 이외의 결말은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정현과 같은 세계의 현정은 망치를 들기보다 프레임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자신의 말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자신은 자유의지가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비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곧 작가라고 생각하는 식이다. 고차원의 누군가와 의식을 공유하는 것일 뿐이지 나를 잃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다.


또 [현정과 정현의 세계]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오면 [현정과 승원의 세계]의 승원은 오히려 자신의 세상이 만화이기를 바란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운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며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의 삶은 만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승원의 삶은 내가 읽는 만화 프레임 속의 삶이지만. 승원이 현정과 만나 ‘만화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에도 작가의 의도를 굳이 역으로 생각해 의미를 부여하며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투명한 벽 너머를 응시하는 시선은 정현이나 J와 닮아있지만, 승원은 무기력하거나 비관적이지 않다. 


트루먼쇼의 트루먼은 어쩌면 가장 까마득한 프레임에 갇혔을지도 모른다. <다섯번째 벽>의 인물들은 최소한,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 인물들이었으나 <트루먼쇼>에서는 트루먼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정현과 J가 인지한 세계보다 훨씬 더 가짜에 가까운 세계인 것이다. 가족도, 우정도, 사랑도, 트라우마도, 어쩌면 자신의 취향도, 성격도, 직업도. 자신의 모든 것이 짜진 각본에 따라 정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자신을 부정하기 좋은 상황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트루먼은 망치를 손에 쥐고 프레임에 저항한다. 폭풍우나 트라우마는 트루먼을 막을 수 없었다. 트루먼은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는 제 세상의 창조주에게 소리쳤다. “나를 막고 싶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야 할 것이다”라고. 몸을 산타 마리아호에 묶고 끝까지 항해해 결국 세트장의 끝에 다다랐다. 프레임에 닿았다. 그리고 그는 유일하게 프레임을 뚫고 밖의 세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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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J나 정현, 승원, 그리고 트루먼처럼 어떤 통제할 수 없는 세계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면 그건 정말 절망적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애초에 J와 정현의 ‘이 세상이 만화다’라는 추론을 부정할 수 있는 방법부터 없다. 그건 논리보다 고차원적이면서도 믿음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또 이 세상이 만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돈이나 권력, 하다못해 내 취업이나 연애 따위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래도 현대사회의 나는 자유롭지 않은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는 내내 이 생각은 불쾌할 정도로 반박당했다. 인간은 유전자를 옮기는 기계에 불과하고 유전자가 프로그래밍해놓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컴퓨터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전자는 강력한 듯했다. 


그래, 이 세상은 만화나 세트장일 수도 있다. 운 좋게 이 세상이 세트장이라면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만화라면? 사각의 프레임을 도대체 어떻게 벗어나야 하지? 또 나에겐 자유의지가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순혈 문과라 자세한 건 잘 모르겠지만, 인간이 유전자를 명령에 따르는 존재라면 지금껏 자유를 위한 투쟁은 무슨 의미였고, 나의 선한 마음과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과 이런 ‘인간다운’ 가치 모두가 번식을 위한 거였다면 인간은 뭐지? 나의 존재 이유는 뭐지? 


결국 J나 정현이나 승원이나 트루먼이나 나나, 전부 비슷한 현실을 살고 있다.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놓여 ‘스스로’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어떻게 살 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J나 정현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 오직 하나뿐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 트루먼처럼 죽을 각오로 프레임을 깨부술 수도 있는 거다. 처음부터 이 세상은 만화라고 믿지 않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믿더라도 현정처럼 다른 시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결정, 나의 선택이다. 같은 현실에도 그것 하나만으로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박상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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