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 불은 어디로 갔을까 – 연극 ‘육쌍둥이’

글 입력 2023.07.0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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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육쌍둥이 포스터.jpg

 

 

인간의 욕망은 흔히 불에 비유되곤 한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불이 필수적이듯이, 삶의 동기가 되어주는 욕망이 아예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의지를 잃을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불이 그렇듯 그것을 품은 인간을 언제든 집어삼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옮겨붙어 재난을 초래할 위험성을 안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불을 안고 사는가. ‘즉각반응’의 연극 <육쌍둥이>는 불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안의 불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육쌍둥이 공연사진_1.JPG

 

 

그리스 비극의 구성 방식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육쌍둥이>는 코러스 장을 맡은 여인의 해설로 시작한다.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고물상에게 발견된 일란성 육쌍둥이 함화자, 이기라, 최고야, 신기해, 박수처, 조진내. 10살이 되었을 무렵 각자 집을 나갔던 이들이 아버지인 고물상의 부고 소식을 듣고 10년 만에 집에 모인다. 어머니인 여인과, 쌍둥이 중 유일하게 집을 나가지 않았던 조진내가 다섯을 맞이한다.

 

누군가의 죽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인 자리이건만, 엄숙하고 차분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일단 쌍둥이의 차림새부터가 그렇다. 얼굴에 붉은 칠을 하고 성인인데도 기저귀를 찬 모습으로 시끄럽게 근황을 떠드는가 하면, 고물상의 죽음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쌍둥이들의 이러한 말과 행동은 위화감을 풍기며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무대 역시 그로테스크하고 광기 가득한 모습으로 연출된다.


조진내를 제외한 쌍둥이들의 대화를 통해 고물상이 전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며, 육쌍둥이가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환경에 방치되어 자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심지어 어머니인 줄 알았던 여인이 사실은 누나였다는 것도 밝혀진다. 쌍둥이들이 대화를 나눌수록 무대 위는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는 문명의 세계와 점점 멀어진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마땅히 기대하는 인간적인 가치가 희미해지는 이곳에서 붉게 타오르는 욕망만이 유난히 선명하다.

 

 

육쌍둥이 공연사진_7.JPG

 

 

고물상이 가지고 있던 땅이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며 땅값이 폭등했다는 소식에 연극은 다른 국면을 맞는다.

 

한바탕 노래가 지나가고 다시 등장한 다섯 쌍둥이 얼굴의 붉은 칠은 한층 더 짙어지고 넓어져 있다.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재산 앞에서 눈이 벌게진 이들은 무엇이든 하려 든다. 자신이 더 많은 재산을 갖기 위해 지금껏 집을 지킨 조진내와 여인을 짐짝 취급하는 일도 서슴지 않다가,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조진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른다.

 

이들이 일란성 쌍둥이라는 설정과 모두 기저귀를 차고 있는 모습은 욕망 앞에서 우리가 구분되는 존재인가 묻는 듯하다. 쌍둥이들은 분명 이름도 다르고 각자 꿈꾸는 미래도 다르지만 욕망이라는 불을 품고 그 앞에서 ‘똥오줌 가릴 줄 모르는’ 모습은 같다. 극 중 욕망을 자각한 이들이 동시에 기저귀에 실례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충격적인 동시에 매우 상징적이다.

 

욕망 앞에서 인간은 수치심 없이 그저 본능에 따르는 쌍둥이 같은 존재는 아닐까.

 


육쌍둥이 공연사진_10.JPG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 이야기에서 한발 물러나 소식을 전하기만 하던 막내 조진내는 어떤 사람인가. 똑같이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그의 얼굴에는 붉은 칠이 없다. 쌍둥이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형제들의 욕망에 휘말리는 것처럼 보이던 조진내의 비밀은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욕망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던 그의 속에서 사실은 불이 타오르고 있으며, 내내 아이스바를 물고 있던 건 그 불 때문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조진내의 불은 조진내의 것이 아니라 죽은 고물상에게서 옮겨붙은 것이다. 일당을 준다는 말에 재개발 지역 철거 현장에 나갔다가 화재를 만났고,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거기서 불이 옮겨붙었다는 고물상의 이야기는 이 작품의 모티프가 된 용산 망루 철거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09년 재개발 지역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일어나 6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전반부에서 다섯 쌍둥이가 얼굴의 붉은색으로 보여준 것이 개인적 차원의 욕망에 가깝다면, 후반부에서 조진내의 내면을 태우는 불은 시대를 건너뛰며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욕망으로 해석된다. 이 불은 절대 꺼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계속 옮겨가며 반드시 누군가를 해치고야 만다. 그래서 인간의 원죄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내내 말이 없던 조진내는 더듬거리며 서투르게 외치기 시작한다. ‘내 안의 불, 꺼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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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내를 제외한 다섯 쌍둥이는 무대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리 안의 불을 다루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형제들은 불을 꺼달라는 조진내를 함께 끌어안으며 뒤늦게나마 문제를 해결하려 애써본다. 육쌍둥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중얼거리는 모습은 일종의 의식을 보는 듯하다. 욕망 앞에서 기저귀를 찬 자기 자신들, 그리고 불에 스러져 간 사람들을 애도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모티프가 된 사건이 제대로 된 진상 규명 없이 농성하던 철거민에게만 책임을 돌리며 마무리되었던 것처럼, 연극의 불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더 큰 불이 되어 파국을 불러온다. 조진내를 제외한 쌍둥이들은 쓰러져버리고, 여인이 자기 자신의 불을 통제할 수 없는 조진내를 칼로 찌른다. 그래도 불은 꺼지지 않고 여인에게로 온다.

 

결국 그 불이 여인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과 무대 전체를 활활 태우면서 연극이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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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처음에 쌍둥이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무대 위를 비인간적이고 무질서한 공간이라 여겼지만, 연극이 끝나고 나면 질문하게 된다. 과연 무대 위는 정말로 현실과 분리된 ‘비인간적인’ 곳인가?

 

죽음이 조롱거리가 되고 돈을 위해 사람을 처분하며 급기야 욕망이 참사로 이어지는 무대 위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볼 때 인간을 가장 잘 표현한 곳,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곳일지도 모르겠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물상에게 붙은 불 역시 그때 철거 현장에서 처음 발생한 게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옮겨붙었을 불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 근현대사 속 여러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은 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옮기기만 했을 뿐이다.

 

그 불은 또 어디로 갔을까. 어디로 옮겨붙어 무엇을 태우고 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무대를 태우던 불 아래에서 살고 있다. 끌어안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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