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년들의 소꿉놀이 - 타조소년들, CK ON STAGE

이런 능구렁이 같은 청소년들 같으니라구
글 입력 2023.11.2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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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K ON STAGE, 그 두 번째 무대 타조소년들 공연에 다녀왔다. (1화는 지난 편 참조) 날이 춥지 않아 좋았다. 딱 적당한 날씨, 이런 날이면 얼마든지 영감이 샘솟아줄 것 같아. 기분 좋게 혜화, 한예극장으로 미끄러 들어간다. 팸플릿을 받고 한번 훑어본다. 지난번 팸플릿의 내용구성이랑 묘하게 다르다. 


청광문화산업대학교에 대한 소개와 입학안내 정보들이 곧바로 눈에 띈다. 본 극은 CK ON STAGE 커리큘럼의 일환, CK ON STAGE는 청광문화산업대학교 공연예술스쿨의 양성 프로그램이고. 오늘 만나게 될 공연자들은 청광대 공연예술학과 학생들이 펼치는, 일종의 졸업작품 같은 것일까, 생각했다. 


잠깐 학생들에 대해 상상한다. 무대에 서기까지는 기나긴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학과 내내 연극 무대에 서기 위해 공부하고, 연습하고, 훈련하고, 커리큘럼 프로그램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무대를 준비하고, 마침내 무대에 서는 일련을 상상했다.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크루원들과 밤새 연습실 거울 앞에서 연기하고, 가끔은 술을 한 잔씩 하고, 공연 일자가 다가올수록 긴장에 떨고, 서로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응원하고,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네.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어둠이 내린 무대 가운데 등장인물들이 정자세로 앉아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라보는 나는, 어딘가 좋은 기분이 들었다. 


*


연극이건, 문학이건, 음악이건 무엇이 됐든 간에, 예술향유에서 가장 재밌는 순간은 제목을 대하여 상상하고 유추하는 일이다. 타조소년들의 제목을 바라보면서, 타조의 인상을 기억 속에서 꺼낸다. 얼굴이 참 작고 그에 비하자면 눈이 참 커다랗지, 목도 가늘고 길게 뻗어 있고 다리는 아주 깡마르다. 검은 털이 나 있는 몸통만이 넉넉하게 퍼져 있는데, 저 구조가 역학적으로 문제가 없는지 걱정하게 만들곤 해. 


또 무엇이 있지. 초원을 내달리는 타조의 모습, 100미터 스프린터가 가지는 역동적이고 응축된 모습이라기보다는 좌우로 살짝씩 뒤뚱거리는 우스운 모습, 스프린터의 뾰족한 스파이크가 내는 바삭하고 민첩한 소리의 모양새라기보다는, 뼈 발굽을 똑딱거리는 소리의 모양새 같은. 어딘가 유쾌하고 귀엽다고 할까. 날개를 펼치며 우다다다 달려가는 타조의 뒷모습을 생각하자니, 그게 소년들의 뜀박질과 썩 어울린다는 생각에 미친다. 생각할수록 타조가 소년 같다는, 즐거운 사고편향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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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조소년들, 이름에서 짙은 소년의 냄새를 맡는다. 팸플릿에 쓰인 다음의 말이 잇따라 눈에 확 들어온다. '연극계의 현실상 프로 무대에서 10대 등장인물을 10대가 연기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에, 20대 후반에서 30대의 배우들이 10대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 극은 20대 초반의 배우들이 10대를 연기한다. 그만큼 진솔하고 순수한 모습이 연출될 것을 자부한다.' 그렇겠구나. 풋풋함이 오히려 소년극을 소년극답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후에 무대를 보고 있노라니, 군데군데 자잘한 실수들이 눈에 띠었다. 별건 아닌 것들, 오토바이 손잡이 모형의 헤드라이트가 분리되어서 무대에 건전지가 튀어 구른다거나, 대사 한 군데의 앞뒤 순서를 혼동했다거나 하는, 아주 자잘한 실수들. 그때 나는 어딘가 조금 짓궂은 눈빛으로, 따지자면 삼촌 같은 눈빛으로 순간 배우의 표정을 관찰했다. 배우들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무대를 이어간다. 그 모습이 참 완숙하게 느껴졌다.


극이 시작했다. 첫 장면은 아주 전형적인 소년극 양식이다. 고교 또래로 보이는 소년들이 바다 어딘가로 여행을 가서, 핸드폰을 거치한 삼각대를 펼쳐놓고 타이머를 누르고, 그 앞에서 천진이 행복해하며 온몸으로 만끽하는 즐거움을 뽐내는, 그런 모습. 나한텐 그런 기억이 없어서, 아닌 게 아니라 내 고향 경상도 머슴아들은 저렇지를 않거든, 이런 무뚝뚝하기만 한 놈들. 그래서 언제나 이런 장면 앞에서는 공감이 잘 안 되곤 해. 그래도 관극 경험이 쌓일수록, 이것이 전형적인 양식이라는 점으로서 익숙해지고, 극적인 양식으로써나마 이해되기 시작하는 건 최근 느껴지는 다행인 점이지. 


저 재기발랄한 놈들이 이제부터 어떤 소란과 소동을 몰고 올까,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것으로 극은 시작한다. 그러나 신 넘버가 두어 개 지났을까, 곧바로 주인공 '로스'가 죽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족히 빠른 전개라고 생각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극 전반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시원한 전개이다. 서사 전개 및 내용 전환이 매우 매끄럽고 유쾌하다. 지루할 틈이 거의 없었어. 타조가 내달리는 듯이, 극에는 소년들이 달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딱 그처럼 극도 계속해서 뜀박질하듯이 경쾌하게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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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의 죽음을 극 초반부에 배치했으나, 극은 종장에 이르기까지 명랑한 바이브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건 일견 소년답다는 인상을 자아내지만, 조금 더 궁리하자면 대단히 완숙하다. 진지하지는 결코 않고, 가볍지는 또 않은, 그 사이 절제된 유쾌함이란 분명 완숙한 극본과 연출의 소산일 테다. 연출적인 부분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무대 구성물은 흰색 회칠을 한 컨테이너 박스와 플라스틱 파레트가 전부였는데, 소년들이 구성물을 옮기고 쌓는 것까지 극 내용과 전개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그러니까 무대 암전과 신의 분절 없이 박스와 파레트를 옮기는 것까지 연극적 맥락에 매끄러이 포함시켰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소년들은 하얀 박스와 파레트를 옮기며 가상의 무대를 만든다. 그건 소년들이 흰 도화지 위에 그려내는 상상 같았어. 관객은 그 상상에 동참한다. 가로로 길게 세운 채 겹치어 정렬한 파레트는 기차역이 되거나, 열차의 문이 되어주었고 층층이 쌓은 파레트와 컨테이너 위는 번지점프대가 되었지. 또 어떻게 구성하면 2층 건물과 계단이 되기도, 폐건물이 되기도 했다. 빔프로젝터와 영상을 이용한 직관적 시각 연출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극의 무대는 대부분 상상에 의해서 구성되고, 고로 관객을 상상에 동참시키는 것이 연출적 관건이 되겠지. 배우들은 아주 성공적으로 우리를 그 상상 속에 동참시켰다. 


극본이 매우 재치있고 4명의 배우들은 아주 성공적으로 그것을 표현해냈어. 모든 배우가 1인 다역을 수행한다. 그 절정은, 소년 3명과 소녀 3명이 서로 쌍쌍이 짝을 지어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장면에서 드러났다. 무대 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4명뿐이었지. '로스'를 향한 여정의 기차 안에서, 바른 편 의자에 앉아 있는 또래 여자아이 3명한테 눈길을 뺏겨버린 소년들은 다가가고, 추파를 던지고, 서로 밀고 당긴다. 그 일련의 장면을 4명의 배우들이 이 자리 저 자리 번갈아 앉아가면서 매끈히 표현해냈어. 


가로로 길게 세워둔 파레트는 배우들이 페르소나를 탈의하는 백룸처럼 기능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런 장치 없이도 과감하게 관객 앞에서 페르소나를 전환하기도 했다. 사내아이를 연기해 나가다가, 조명 전환, 맥락적 분기 없이 곧바로 여자아이의 연기를 이어나가는데, 극적 상상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배우들의 능청스러움에 놀랐다. 


이 극에서 연출적인 자신감을 엿본다. 소품과 조명, 그리고 시각효과는 관객의 극적 상상을 보조하고 유도하기 위한 장치이지. 오직 흰 소품 몇 개와 배우들만으로 극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나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관객의 몰입에 균열을 가게 해서야 극의 설득력과 호소력이 반감되는 셈이니까. 연출자는 꼼꼼하게 설계하고, 배우들은 철저하게 수행했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청소년들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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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게 우리를 소년들의 상상으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딱히 집중해서 들어가고자 하지도 않았는데, 쑥-하고 내 영혼을 빼돌리는 그 솜씨를 음미했다. 그들은 말없이, 내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 여기 이 네모난 건 열차야, 저 건장하고 부리부리한 눈썹을 한 남자애는 케일리라는 여자애 시킬 거야. 근데 왜 아무런 반감이나 저항감이 안 드는 거지. 내가 계속 의아하게 생각한 부분이 딱 이것이었겠군. 오, 나도 이제는 꽤 나이 든 사람이 되었거든. 내 상상력과 선입견은 굳이 가감할 것도 없이 딱, 성인 평균 정도의 그것이 되어 있지. 


아예 잊고 있었던 것, 소꿉놀이하던 기억이 떠오른 건 왜일까. 나는 엄마 할게, 너는 아빠 해. 자, 여기 빈 그릇에 응-차, 이게 오늘 저녁이야. 저녁 메뉴가 뭐야? 당연히 카레지, 아까 당근도 썰어 넣었다고. 아, 아까 열심히 썰던 게 당근이었구나? (숟가락으로 퍼먹는 시늉), 야- 맛있네.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 뭐, 대중 이런 기억. 근데, 보이지 않던 카레가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면 어떤 기분이겠어. 김이 모락모락 나고, 빨간 당근이 거기 둥둥 떠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놀라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겠지?


나는 이 극을 더 많은 사람이 관람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딱히 집중을 기울이는 상냥한 노력 없이도 그대들의 영혼을 쏙-빼내서는 이리저리 이끌어줄 테고, 그건 분명 즐거울 거야. 내 관극 경험이 적지도 많지도 않은데, 이들의 몸짓에 어딘가 각별한 애틋함을 느낀다. 소년들의 소꿉놀이. 다른 시각 매체와 비하여 연극은 그야말로 상상에 의존하는 장르이지. 편집과 소품장치의 제한이 있는 게 엄연한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오늘의 상상은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어. 그건 선입견이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지. 홀린 듯이 따라가노라면 메타인지가 계속, 어 이거 이상해요, 라고 말하고 있을 거야. 소년들이 어른을 골탕먹이며 키득거리는 듯이, 고장 난 선입견을 대하며 내 안의 무언가도 키득키득 웃고 있더랬다. 아- 상쾌하군. 


제재와의 감정적 거리 조절이 잘 안되는 게, 아무래도 나는 단단히 사랑에 빠졌나 보아. 아 참, 그래서 제목이 왜 타조소년들인지는 설명을 못 했구나. 그건 연극을 한번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주인공이 다 설명해주는 손쉬운 의미라구. 영업은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이만, 오늘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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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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