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정상이라는 피안 彼岸 - 넥스트 투 노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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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트인사이트에서 문화초대 알림톡이 왔다. CK ON STAGE라는 이름이었다. 그다지 흥미가 돌지 않았다. 팝업창을 열어 무심히 들여다보았다. 넥스트 투 노멀이라는 이름이 곧바로 눈동자에 꽂혔다. 넥스트 투 노멀, 이렇게 이 뮤지컬이 내게로 물씬 다가오려는가. 그 이름은 아주 익숙한 이름이다, 넥스트 투 노멀. 나는 이 뮤지컬을 상기하며 그녀가 피워낸, 수 번의 이야기꽃들을 안다. 잔뜩 머금었으니. 그녀는 이 뮤지컬을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옆에서, 무언가를 저토록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했다. 완전히 낯선 것을 대하는 조심스러움과 아예 공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완벽한 이격감, 그리고 의뭉스러움으로써. 언젠가는 꼭 보아야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은 이 뮤지컬을 사랑하게 하였는지에 대해서, 알아낼 수가 없었으나 나로서는 꼭 보아야 할 이유 정도 생겼다. 그 눈동자에는 쨍한 빛이 났다. 사람이 저토록 사랑하는 무언가를 대하고 있으면은 주변으로 그 열꽃이 피어나는구나, 강렬했다.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 넥스트 투 노멀(이하, 넥스트) 초대 떴던데, 가시나요. 자기는 문화초대가 뜨기도 전에 개인 예매를 했고 지인과 관극 예정이란다. 역시 사랑인가. 나는 그 사랑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문화초대 신청을 눌렀고, 오 세상에, 떨어졌다. 정확히는 반만 되었다고 해야지. 이번 후원프로그램은 '넥스트'와 '타조소년들'이 같은 프로그램으로 짜여 있었고, 나는 둘 다 신청했고, 하나만 되었고, 그게 '타조소년들'이다. 어, 대표님께 넌지시 물었다, 혹-시 넥스트 표 다 나갔나요, 네 열띤 호응에 따라 전석 고루 배분되었습니다, 웃음 웃음, 오 상냥했다.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넥스트 초대 선정되셨느냐. 떨어졌다고 했다. 무료 공연이니 개인 예매로 해보시는 게 어떠냐고 물어주었다. 음, 무료 공연이었구나. 게으름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무료 공연이었구나, 그래서 개인적으로 관극하고 왔다. 그래도 오피니언은 써야지. 문화초대로 가면 글머리에 [Review]가 붙고 개인적으로 가면 [Opinion]이라 붙는다. 그래서 당당하게 [Opinion]이라 적는다. 무료 공연이라, 게으름에 대한 부끄러움과는 아예 다른 곳으로부터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무료 공연이 일어나고, 오로지 무대만을 필요로 하는 젊은 예인들이 떨리는 백스테이지를 설레고, 나는 그걸 모르고, 너도 그걸 다는 모르고 있었겠지. 무료에요, 보러 와주세요, 이런 생각이 들자 어딘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근데 다시 알고 보니 미안할 건 아닌 것 같더라.
'CK ON STAGE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공연예술스쿨에서 주관하는 콘텐츠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으로, 본교 출신 예비 예술인에게 1년간 프리프로덕션부터 쇼케이스, 전문 공연장에서의 트라이아웃 발표에 이르기까지 작품개발의 모든 단계를 지원하는 신진예술단체 육성지원사업'이라고 한다. 홍보문구를 그대로 가져왔다. 아무래도 와 닿지가 않아서 말이지, CK ON STAGE란 낱말은. 쉬운 말로는 예비 예술인 지원사업이고, 내 티켓값까지 그대들이 대신해서 내주었다는 말이지? 고마울 일이야. 그렇게 내가 이 뮤지컬과 만나게 되었으니. 이 프로그램이 막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예비 예인들에게는 얼만 한 위로가 되어줄는지, 물씬 느껴지지 않는 채로는 생각했다, 잠깐 묵념하듯이. 서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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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투 노멀, 개인적으론 이런 서사가 있는 뮤지컬이다. 나는 이 뮤지컬 자체보다는, 이 뮤지컬을 열렬히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한 기억으로 찾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먼저 찾은 객석에 이르러서야 배부받은 팸플릿을 꺼내어 훑어본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내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이야기란다. 오, 나는 어딘가 불길했지. 그건 내 오랜 기억들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거든. 그러나 불길함이 곧잘 께름칙한 것이리라 생각지는 말아, 나는 조금 불안하고 그보다는 더 편안함을 느껴, 향수 같은 것이거든. 그곳이 꿈엔들 잊힐 리야, 그다지 고운 마음만으로 그려보진 못할, 그러나 기억이 오래면 서리는 먼지 같은 애틋함이지.
넥스트 투 노멀, 제목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 웅성이는 객석 안, 혹은 주변에서. 그것은 평범함의 옆, 평범함의 언저리, 채 이르지 못한 평범함, 아니면, 평범함의 주변, 평범함에 둘러싸인 비정상, 숨죽이는 비정상, 이런 생각을 열거한다. 재미있겠군. 나는 어딘가 불길한 것들을 사랑해, 비록 모든 불길함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을지라면, 그럼에도 웬만한 비정상들은 친숙히 여긴다고 말하지, 놀라거나, 경계하지 않아. 굳이 이에 대해 나열하는 짓궂음은 생략도록 하지. 그게 더욱 불길한 일이거든, 읽는 그대들로서는.
아내 다이애나는 조울증과 우울증, 그리고 정신분열증과 과대망상증까지 하여튼 다양한 정신장애를 가진 여성이다. 남편 이름은 댄이다. 댄, 댄 굿맨, 오 좋은 사람. 당신은 언제나, 괜찮을 거라고 말한다, 상냥하게 말한다. 참으로 뚝심 있는 사내였지. 십수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저러고 있으니 말야. 그런 그가 미더운가, 의지할 만한가, 글쎄, 사람들은 착각하는 것 같아. 한결같이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덜컥 의지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 한결같이 사랑하는 모습이 있더라면, 그를 덜컥 사랑하며 모든 걸 이겨나갈 수 있으리라는 착각. 괜찮은 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괜찮지 않은 건 너도 나도 아니라, 그런 너를 지켜보는 나와 그런 너를 외면하는 네 자신이지. 너도 나도 괜찮지 않아.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시간을 견디며 미약한 희망을 품고, 스러지고, 차차 닳아 지쳐가는 것만이 방법의 전부이지, 이별하지 않는 한. 하지만 굿맨, 좋은 사람, 그것만이 방법의 전부였을까. 우리가 우리로서 존재하는 채로 모든 시련을 이겨내는 것, 좋은 방법, 그것뿐이었을까.
우리는 평범함을 노래해. 사실 그건 그대의 노래이지, 나의 노래는 아니었을지도. 나는 미치지 않았는걸. 나는 자주 인식을 잃고, 저녁 만찬으로 샌드위치를 준비하다가 그만, 바닥에 퍼질러 앉아 더럽혀진 빵 위에 광기처럼 양상추를 퍼 얹고 있더랬지, 미친 사람처럼. 오, 그렇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어. 어딘가 조금 남다를 뿐. 내 안에는 나의 비정상을 일깨워 줄 무엇도 없어, 그건 정상이기를 스스로 희망하는 사람과 자신의 비정상을 경멸하는 사람의 마음이거든, 그렇다면 나는 미친 건가,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게 할 그 무엇도 없다면? 당신은 참 신중한 말투로 병원으로, 정신과 의사에게로 날 내 몰지. 나는 가기 싫어, 그 약이 무슨 소용이란 말야. 약을 먹으면 불안은 줄어들지만, 머리가 아프고 앞이 잘 안 보이고 발끝의 감각이 사라지지. 이게 무슨 약이란 말야.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는 꼴이라니. 그건 그저 고통을 다른 고통으로 치환하는 일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복약 때마다 어떤 고통이 올지는 모르지. 현기증, 졸림, 피곤, 불면증, 또는 두통, 박탈감, 분노, 무기력, 짜증, 성불감증, 혹은 온몸이 불타는 성적인 충동. 이것 봐, 하나같이 엉터리고 모순적이지. 심지어는 의사도 말하잖아, 가장 명심할 것, 죽을 수 있음. 약으로 망상증이 줄어들면 조울증은 심해지지. 이런 걸 16년이나 해왔다고.
오 다이애나, 나도 당신 마음, 당신 아픔 알아. 아니, 아니! 댄, 넌 몰라. 허-, 참, 당신은 언제나 날더러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 그대가 늘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과 한없이 심연으로 몰락하는 심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매일 아침 그다지 깨고 싶지 않고 별다른 즐거움 없이 맹탕 같은 삶을 굽어보는 심경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몸소 느끼게 될 그 무엇도. 하지만 그대도 모르잖아, 그대 곁을 지키고 있는 내 썩어 문드러지는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도. 하지만 그대 안엔 내가 있을 자리가 있나. 나는 그대를 생각해, 언제나, 하지만 그대도 나를 생각하나. 그럼에도 말해줄래,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 그렇다면 말해주어. 난 널 버리지 않아, (포기하고 싶어), 그대를 도울 사람은 나, (과연 할 수 있을까), 미쳐버리겠군, 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내가 선택하는 것은 희망뿐! 담보 없고 증거 없는 희망뿐,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희망 뿐인 자에게는 환상이 자리하지. 내가 괜찮냐고? 묻지 말아 줘, 나는 괜찮다고밖에 답할 수 없는걸.
"미친 건 너일까, 나일까" 미친 너, 그런 너를 바라보며 헤질 대로 헤지고 지쳐가는 나. 미친 건 너일까, 나일까. 반쯤 미쳐버린 여자와 그런 그녀를 붙잡고 매달리는 나.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한 가지 길밖엔 없다. 언젠간 좋아지리라는 희망! 그것 말고 우리가, 아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포기하는 것? 그건 안 돼, 나는 그대를 너무 사랑해. 댄은 지독한 사랑의 모순을 겪는다. 댄의 인내와 희생은 오로지 다이애나만을 가리키고 있나, 아니, 그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지. 댄은 포기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죽여야만 한다, 그녀를 떠나갈 수 없기에. 그렇다면 댄의 사랑은 이타인가 이기인가, 오, 재미있고 잔혹하기도 하지. 모순, 표면적으로는 이타이고 그렇기에 그녀 곁에서 태어나는 고통은 인내로 치장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위하는 것은 누구이지? 약을 먹고 싶지 않은 다이애나? 아니면 그런 그녀의 발작을 지켜보는 것에 지쳐버린 나. 미친 건 너일까, 나일까. 아니, 아니지, 그대 둘 모두 광기의 언저리에서 끝없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야.
다이애나는 맏아들이 8개월이 되던 해 그를 떠나보내고, 16년간 그 자리에 멈춘 채 미쳐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다독이며, 일으키며, 정상 가족을 향해 나아가려고만 하는 댄은 그 자신의 눈부신 이기, 실은 선택하고 결단내리지 못하는 끝없는 망설임 속에 지쳐가지. 오 익숙한 전개야. 익숙하지. 하지만, 본 극이 내가 써내린 정도로 이렇게나 우울하지는 않아. 음악이 너무 짜릿한 걸, 그 안에선 아무런 음울함도 형성되지 않아. 서사는 써놓고 보면 썩 불쾌할 정도로 음울하나, 음악은 정 반대의 무드를 지향하고 있는 듯하군. 미치지 않은 광기라, 오 그래, 내가 좋아하는 단어, 표백된 광기, 이 서사와 음악이 맞물린 공간에서 태어나는 감정, 관객이 흠향할 수 있는 감정은 표백된 광기야. 마셔도 다치지 않고 매캐하거나 뜨겁지 않은, 그런 광기이지. 또는 선글라스로 투과하여 보는 햇빛 같다고 할까. 그다지 심경이 혼란스러워지지 않아, 이 극은 우울이 내포하는 필연적인 불쾌함을 교묘히 절제한다. 쉽게 맛볼 수 있게 식혀둔 스프 같은 광기, 그것은 음악적 카타르시스로 대체 혹은 승화시켰다.
내가 음악극에서 가지는 못내 아쉬움, 그건 광기를 음악적 카타르시스로 대체시킨다는 점이야. 그로써 광기에 멀고 낯선 사람조차도 이 서사에 다가올 수 있게 하는, 그런 장치이자 포괄성이지. 애초에 음표로는 인간의 심연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 같아. 현악을 아무리 불쾌하게 찌그러트려도, 그건 짜증에 불과할 뿐 심연을 담아낼 수 없지. 차설. 여하간 나는 이 극을 마음껏 자랑해도 좋을 것 같군. 비슷하게 투영할 기억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좋고, 전혀 그런 것을 갖지 않은 명랑한 사람이더라도 좋겠다, 이 극을 권해보기에. 전자면 공감을, 후자면 이해를 얻고 돌아 나올 수 있겠지. 극이 참 좋아. 참 잘 만든 극본이고, 참 잘 된 연기였어.
자, 그리하여 이 연극은 어떻게 마무리되었을까. 다이애나는 전기 충격 요법으로 맨정신을 찾았으나 기억을 잃어버려. 가족들은 정상이 된, 그러나 어딘가 완전히 정상은 아닌 다이애나와 함께 새 미래를 꿈꾸지. 정상 근처의 어딘가, 넥스트 투 노멀. 하지만 다이애나는 떠나기로 해. 그녀도 노력해봤지만, 이미 깨져버린 것들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지. 너무 많이 돌아왔잖아? 이제 와서 이미 일어난 것들을 전부 없던 것으로 돌려버리고 새로 출발할 수는 없잖아. 댄, 좋은 사람, 당신은 할 만큼 했어. 당신은 아니라고 못 간다고 날 붙잡겠지. 하지만 나는 가야 해, 내 안에 뭔가가 죽었어, 아마 아들이 죽어버린 순간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어. 나는 완벽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어, 지금 간만에 돌아온 이 정신도 불안하지, 우리는 함께인 채로 같이 미쳐갈 거야. 그러니, "뭐 어쨌든, 난 떠나,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시련마저 이겨내야 하는가, 어느 순간에는 보내주어야 하는가, 언제나 이 답 없는 질문 앞에서 나는 후자를 택해. 정말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지, 편하게 해주어야지, 이별할 줄 알아야지, 그게 아픔일지라도. 결과론적 행복과 과정으로서의 행복, 혹은 그런 사랑이라, 이 문제를 이렇게 바라봐도 괜찮으려나. 그렇게 다이애나는 떠난다.
자식들, 특히 딸 아이 나탈리 얘기는 거의 못 했네. 불쌍한 아이지. 두 부모 모두에게로부터 소외받고 또 다른 광기로 자라나고 있었거든. 아빠는 엄마만을, 엄마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건 각자 벅차게 견디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딸은 소외되었지. 그래도 곁에 좋은 사랑이 있으니 다행이야, 어떻게든 잘 되겠지. 본 극의 제목 "넥스트 투 노멀"은 딸 아이의 입으로부터 나온다. 다이애나와 이별하기 직전, 모녀는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미안하고, 사랑한다, 엄마는 말한다. 아이는 그녀와 그녀가 건넨 이별을 함께 받아들였다. 씩씩하지? 그리고 외치지. "평범 같은 건 안 바래, 그건 너무 멀어. 그 언저리에만 가도 괜찮아, 나는 얼마든지 견딜 거야. 견딜게."
이게 진정한 의미의 해피엔딩이 아닐까. 만약 제정신이 돌아온 다이애나와 댄이 새 출발을 하고, 나탈리의 마음을 조금씩 치유하고 찬찬히 정상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더라면 이런 느낌은 아니었을 거야. 거긴 또 거기대로 진흙탕 길이거든.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나머지 문제도 다 같이 해결되는 건 아니지.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의 문제가 생겨나게 마련이니까. 가장 차분하고 소박하며 현실적인 엔딩이야. 그래서 이 마무리에 더 마음이 가는군. 이별이 꼭 나쁜 건 아니야. 서로 곁에서 더욱 사나움이자 슬픔이 될 값이라면, 이별이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 되기도 하지. 거기 수반되는 슬픔은 아픔만이 아니이고, 그건 역설적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하지, 사랑을 찾아서. 사랑이 감추고 있던 속박의 굴레, 놓여나고 우리는 비로소 떠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가간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 정상이라는 또 다른 피안을 향해서.
[서상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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